박영희의 문학경향 흐름과 대표작품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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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박영희의 생애
2. 박영희의 문학경향 흐름과 작품분석
1) 낭만문학기의 박영희
작품 - 「 월광으로 짠 병실 」
2) 신경향파문학기의 박영희
작품 - 「 산양개 」
① 줄거리
② 이해와 감상
3) 카프 결성 이후의 박영희
ㄱ. 카프결성 ~ 카프의 1차 방향전환
작품 - 「 철야 」
① 줄거리
② 이해와 감상
ㄴ. 카프의 1차 방향전환 이후 ~ 카프해체
4) 순수문학기
작품 - 『 포도원에서 』
① 줄거리
② 이해와 감상
5) 친일문학기
6) 해방 후 납북
3. 박영희와 김기진의 대립구도
1) 내용과 형식 논쟁
2) 대립의 원인
3) 문단의 반응과 결과

Ⅲ. 결론

본문내용

위해 김복진·이성태 등 당시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김기진에게 자진철회 형식의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기진은 1928년 문학의 대중화 문제에서 이때 다하지 못한 자신의 이론을 다시 개진했다.
내용·형식 논쟁은 그 직후에 있었던 아나키스트와의 논쟁과 더불어, 초기 카프의 활동을 마감하고 광범한 방향전환론 대두의 한 내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프로 문예비평사의 중요한 이론적 결절점이 된다.
2) 대립의 원인
박영희와 김기진은 초기에는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에 그들이 생리적이고 기질적인 차이 때문에 다른 지향점을 선택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뒤에 나타난 차이는 그들의 사회적 기반의 차이에 의해, 그들의 세계관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김기진은 시골 중산층 출신으로 토지를 매개로 한 계층의 의식과 토착적인 균형성 견지하는 관점을 갖게 되었고, 박영희는 서울 중산층으로 도시의 상업적이고 산업적 계층의식과 더불어 사회적 부동성과 상승요구의 의식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3) 문단의 반응과 결과
김기진과 박영희의 논쟁이 이어지자, 권구현, 양주동이 이들의 논쟁에 끼여들어 절충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권구현은 <전기적 프로 예술>(동광, 1927.3)에서 제재와 표현의 관계를 갈철과 칼날이 장검에 대한 것으로 비유하면서 “김씨의 소위 ‘소설은 한 개 건축이다’라는 말은 그 결론이 예술의 독립적 존재성을 주장하는데 떨어진다.”라고 박영희를 지지한다. 그러나 양주동은 <정묘 평론총관>(동아일보, 1928.1.16)에서 선전 문학일수록 무산문학일수록 더욱 한층 문학표현방식에 치중해야 한다고 여겨, 어떤 문학관에 외한다고 할지라도 합당한 표현 방식을 갖추었을 때에 그것이 진정한 문학작품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 김기진을 지지한다.
임화 등은 김기진을 유화주의 도피경향의 소유자로 비판공격하고, 박영희의 편에 가세하면서 카프 내 분위기가 박영희의 주장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논쟁의 초점 또한 초기의 문학 본질에 관한 작품론 논란에서 비평가의 계급성 논쟁으로 전환, 변질되어 김기진의 입지를 압박하게 됨으로써 카프 내 맹원들 간 반목 해소차원에서 논쟁을 시작한 김기진 스스로 주장을 취하하는 수순을 거쳐 논쟁이 종식되게 된다. 내용과 형식 논쟁의 결과 박영희는 카프 내 헤게모니를 장악, 카프의 전면에 나서 1927년 9월 1일 임시총회에서 자연발생적 문예에서 목적의식적 문예로의 전환을 표방한 카프의 제 1차 방향전환을 주도하게 된다. 박영희는 이 논쟁을 통해 〈카프〉방향전환의 주도권을 잡게 되며, 프로 문학권 내에서 확고한 이론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Ⅲ. 결론
앞에서 우리는 박영희의 여러 방향의 문학 경향의 흐름과 작품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는 선천적인 총명함과 시대정신에 예민한 감각으로 여러 장르에 걸쳐 특출한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카프 초기조직의 중심부에 있었으며 제 1차 방향전환까지만 해도 단연 강경파이자 지도적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영희가 정작 카프를 비판하고, 전향선언을 장문의 평론으로 공표한 것은 비평사적 사건이자 카프 문학 운동 상에서는 선을 긋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박영희의 전향선언문에서 박영희는 자신의 전향 동기를 그 자신이 정치가일 수 없음에서 찾고 있다. 말을 바꾸면 카프 조직체가 정치적 성격을 점점 강하게 띠기 시작하여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박영희는 지도자의 처지에 계속 서느냐 예술가 쪽에 서느냐의 갈림길에 섰고, 마침내 그는 예술가 쪽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 그 이유는 스스로가 예술가로 출발했고 또 그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카프 조직체가 정치가와 예술가의 혼합물이었다는 것, 점점 정치가 쪽의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것, 이 틈에서 박영희 자신은 마침내 예술가 쪽을 택하겠다는 것이 전향의 동기를 이루고 있다.
또한, 박영희 내적인 문제를 들 수 있는데 부모 부양에 대한 걱정과 제 1 차 카프 검거 사건으로 감옥에서 받은 엄청난 고문은 박영희의 정신세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회월이 받은 고문은 박영희의 모든 것을 바꾸기에 충분하였다. 그것은 그의 삶과 연결된 직접적이고도 간절한 문제였다.
회월은 중산층으로 부유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 회월로서는 ‘현실세계를 떠나서 아름다운 환영의 상징적인 세계를 창조하고 이곳에서 고뇌와 우울을 잊고 끝없는 정서의 향락’을 찾기 위해 유미주의에 빠져든 것이 당연할 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유미주의조차도 회월의 정신적인 만족을 주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와서 회월이 선택한 것은 문학을 통한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하지만 삶에 충실했으며 유약했던 회월은 일제 아래의 강압적이고, 변화하는 현실 앞에서 결국 전향을 선언했다.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자신’이라는 말로써 자신이 그토록 지지했던 프로문학을 부인하였지만, 그것은 카프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만 그치고 상실한 예술을 회복하는 방법 및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는 전향을 선언하고 1930년부터 광복 때까지 화려한 친일행위를 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 속죄의 뜻으로 「초창기의 문단측면사」「현대조선문학사」를 집필하였지만 자신의 단 한 구절의 친일행위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양심의 가책과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인간적인 모습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책임 있는 지식인의 모습과는 엄연히 다르며 달라야 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근대문학의 전위에 서서 그것을 이끌어 왔다고도 하고 이끌려 갔다고도 하는 회월. 회월에 대한 연구가 미비한 이 시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의 삶과 행적을 이해하게 된다면, 회월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문학인들의 고뇌와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참고문헌
김윤식, 「박영희 연구」, 열음사, 1989
이동희노상래 편「박영희 전집」영남대학교 출판부.1997
김윤식, 1930년대 후반기 카프 문인들의 전향유형분석 (논문)
노상래, 박영희 연구 -사상전향을 중심으로- (논문)
방종홍, 박영희와 지적방황, 어문학제48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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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20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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