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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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불교사상과 신앙

1. 국가불교적 면모
1) 삼국의 불교공인
2) 국가불교의 성격 강화

2. 무격적 불교신앙
1) 불교와 무격신앙의 통합
2) 본지수적설

3. 불교의 대중화와 정토신앙
1) 불교의 귀족적 성격
2) 대중불교의 등장
3) 교화승의 등장

4. 중관, 유식의 통합과 원효철학
1) 삼국의 불교의 이해
2) 삼국통일을 전후 나타난 불교계의 변화
3) 원효에 의한 중관과 유식의 통합

5. 교종과 선종의 통합과 지눌철학
1) 광종때의 교선통합시도
2) 의천의 노력
3) 지눌의 교선통합

6. 교단의 위축과 식민지불교

유학과 경세론

1. 고대․고려의 유학
1) 삼국의 유학
2) 고려의 유학

2. 주자성리학의 뿌리내림과 학파의 형성
1) 급진개혁파의 유교사상
2) 세종․세조때의 유교
3) 15세기말 훈구와 사림의 대립
4) 사림의 본격적 등장

3. 심성론과 예학의 발달
1) 심성론의 전개
2) 예학의 발달

4. 양명학과 유교 개혁론

무교․도교․풍수지리설

1. 무교
1) 삼국 이전의 무교
2) 삼국시대의 무교
3) 고려시대의 무교
4) 조선시대의 무교

2. 도교와 도교사상
1) 삼국시대의 도교
2) 고려시대의 도교
3) 조선시대의 도교

3. 풍수지리설
1) 의미
2) 우리나라에서의 풍수지리설

본문내용

교사상
1) 삼국시대의 도교
- 고구려에 먼저 전파됨
→ 5세기경부터 고분벽화에서 여러 모습의 신선이 등장
→ 고구려에 공식적인 입장에서 도교가 전파됨에 있어 당고조가 외교사절과 함께 도사를 보내고, 도덕형을 강론 ⇒ 도교를 매개로 한 당과의 평화관계 유지 목적
→ 연개소문이 도교진흥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자신의 독재권력의 이념적 기반을 도교에서 구하고자 함
⇒ 불교계의 커다란 반발을 초래하여 불교계에 커다란 반발 초래
- 백제
→ 한 교단으로서 도교는 존재하지 않으나 단편적으로나마 도교에 대한 이해 가짐
- 신라
→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전하는 선도산성모를 지신으로 하거나 화랑을 국선, 화랑의 역사를 선사라 함
→ 신라말 수련과 공력을 쌓으려는 수련적 도교 수용
⇒ 삼국 전체적으로 유,불에 대한 내용과 함께 최고의 지성인의 필수적인 교양으로 자리매김
2) 고려시대의 도교
- 별을 제사하는 구요당이 창건되어 국초부터 유행
- 예종 때 도교제사를 빈번하게 시행,
㉠ 연경궁 후원에서 도교 최고신인 원시천존상을 모셔두고 매월 재초를 거행
㉡ 이중약의 건의에 따라 한국 최초의 도관인 복원궁 건립
⇒ 예종이 왕권강화 도모하고 이중약이 이를 지지하던 한안인의 사위였기 때문에 예종의 도교 강화는 왕권강화와 관련깊음
- 의종때 재초를 빈번하게 거행하여 국가재정을 어렵게 할 정도로 도교에 열중
⇒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거치면서 왕권을 초월하는 힘에 의지해 지켜보려는 몸부림이 나타남
- 도교가 다신교인만큼 대상신이나 기원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남, 국가나 왕실의 消災招福을 목적으로 실행
- 민간에서는 守庚申이라는 습속이 널리 유행
- 도교적 습속이 생활 전반에 침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교는 하나의 교단으로 발달하지 못하고 국가와 왕실의 消災招福을 위한 재초중심의 科儀的 道敎로 운영
3) 조선시대의 도교
- 1392년 소격전을 제외한 나머지 도교관계기관이 모두 혁파(소격전은 관원과 도사가 배속되어 각종 제의를 주관하는 조선유일의 공식적 도교기관으로 자리매김)
- 1466년 소격전이 소격서로 개칭
- 중종 때 조광조에 의해 소격서 폐지 → 기묘사화 이후 부활하나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사라짐
- 고려시대 이래로 수련교단의 전통이 이어져 도교의 독자적 영역이 이어져 옴
→ 단약의 연조 복용과 같은 주술적 방법이 아닌 엄격한 자기 수련과 공행을 쌓음으로서 몸에 단을 이룩하여 신선이 되고자 하는 것
→ 김시습등에 의해 기본적 체계가 갖춰져 신분이 낮거나 때를 만나지 못한 일부 지식인들과 승려들 사이에 확산되어 가고 잇었다.
- 양생법과 의학부분에서 어느 정도 기여
→ 조선시대 편술된 의서 가운데 동의보감은 도교 바탕으로 의학의 본의를 해명, 체계화
- 조선시대 도교는 교단조직과 같은 구심점을 가지지 못한 채 생활풍속, 민간신앙, 한국문화 곳곳에 침투되어 명맥 유지
- 도가사상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도 조선시대
① 정도전에 의해 시작: 조선의 지도이념 확립위해 이단사상 배척에 앞장선 것으로 도가사상 배척, 극복의 목적
② 유, 불, 도의 회통을 주장하는 견해 제시되어 노자와 장자의 저서를 국가에서 간행하는 등 도가사상에 대해 객관적 입장
⇒ 도덕경을 재분장하여 주석을 붙인 이이의 <순언>
⇒ 한원진의 <장자변해>
⇒ 도가 철학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박세당, 홍석주등에 의해 계속됨
3. 풍수지리설
1) 의미 : 땅에 어떤 기운이 있어 인간의 길흉화복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설로 길복을 얻고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기가 좋은 곳에 국도, 마을, 묘지를 선정해야 한다는 것
→ 음양오행설의 채용으로 이론화되기 시작한 한 대부터 기원한다고 봄
→ 풍수지리설에 가까운 형태로 발전한 것은 동진 때 부터이며 충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장서> 20권을 저술한 곽박에 의한 것
→ 동진이후 풍수설은 크게 두 개의 학파로 나뉨
① 종묘법 : 복건지방에서 시작되어 송대에 널리 전파, 행성과 복을 강조
② 강서법 : 주대에 시작되어 지형과 수세를 강조하며 그에 의해 위치와 방향을 결정
2) 우리나라에서의 풍수지리설
→ 통일신라 말기에 도선에 의해 전파
① 묘지의 선정내지 음택풍수보다 전국토의 지리적 조건을 판단하거나 도성이나 궁실의 자리 선정에 이용
② 풍수설은 미래를 예언하는 도참설과 연결되어 고려왕조의 건국 예언
⇒ 신라 말기라는 사회적인 전환기에 국토공간의 중심적인 위치를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친 경주로부터 중부지방의 송악으로 이동하려는 국토재게획안의 의미
→ 고려시대 지기쇠왕설과 비보사탑설
① 지기쇠왕설 : 지기, 즉 토지·자연의 힘은 오아성하기도 하며 쇠퇴하기도 하는데 지기가 왕성할 때는 그곳에 자리잡은 왕조나 사람ㅇ느 흥성하고 반대일 경우 쇠퇴한다고 봄
⇒ 개경의 지기가 쇠하였기 때문에 수도를 옮기자는 주장이나 국왕이 일정기간 지기가 왕성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남
② 비보사탑설 : 지리적인 조건의 부족함을 인위적으로 고치기 위해서 지맥이 약한 곳이나 산맥이 험흉한 곳에 사찰이나 탑을 세워 불력에 의해 힘있고 순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 ⇒ 사찰남조의 폐단 야기
※ 고려시대의 풍수지리설은 풍수설과 도참설의 결합으로 왕조의 운명을 예언 예시하는 내용이 많음
→ 조선시대의 풍수지리설
①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새로운 도읍지가 물색되는 가운데 한양을 도읍하는데 풍수지리 강하게 반영
② 비보사탑설은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의 입장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렵기 때문에 비보사탑대신 흙을 북돋아 지맥을 보강하거나 바윗돌을 깎아 냄으로서 지리적 조건 보강하는 식으로 나타남
③ 지기쇠왕설의 경우 민심이 흉흉할 때 일시적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현저하게 줄어듦
④ 도참설의 경우 <정감록>과 같은 것이 나타나 정치문제를 야기하기는 했지만 국가의 운영방향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민간에서 부패한 현실을 부정하는 말세적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으로만 존재
⑤ 조선시대에는 방위법 내지 종묘법이 유행하면서 묘자리 선정에 대한 풍수지리설이 주종을 이룸
⇒ 조선시대 세력 있는자가 남의 집안의 선산을 침해하여 묘지쟁송이 자주 나타남
⇒ 집안의 횡액을 산소탓으로 돌려 개장, 이장의 페간이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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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4.25
  • 저작시기2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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