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중국불교미술- 용문석굴
본 자료는 6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해당 자료는 6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6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중국불교의 개관
2.석불사원이란 무엇인가?
3.중국에 있는 주요 석불사원은?
3-1 둔황석굴
3-2 운강석굴
4.용문석굴에 대하여
5.우리나라 석굴암과 용문석굴의 비교

본문내용

축조했는데 이 같은 기법은 세계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석굴사원은 모든 불보살상, 천부 및 나한상들이 질서 정연하게 조각·배치돼 하나의 완전한 불국토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같은 구도는 비슷한 예로 돈황석굴의 벽화가 있으나 석굴조각으로서는 이와 같은 완전한 건축적 구조와 뛰어난 조각으로 이뤄진 석굴 모형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대 용문 석굴, 천룡산 석굴 에서도 석굴사원과 비교될 수 있는 항마촉지수인(降魔觸地手印)의 손 모습을 한 본존상과 보살상, 천왕상, 나한상이 포함돼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지만, 부처의 여러 권속들이 완전히 갖춰졌거나 배치 면에서 석굴사원과 같이 네모난 전실과 둥그런 주실 구조를 보여주는 예는 없고, 석굴조각으로서 석굴사원처럼 완전한 건축적 구조와 뛰어난 조각으로 이뤄진 석굴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석굴사원과 비교할 때 운강 석굴의 불상들은 대부분 손과 머리 부분이 다른 부위에 비해 크게 조성됐고 코·입·옷 주름 등도 곡선보다는 직선으로 날카롭게 처리됐다. 이는 대형 석불을 조성한 경험이 없어 기존 금동불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해 조성했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특히 중국 불교교단에서는 황제를 여래와 동등한 위치에 두었다. 즉 황제가 불법을 수호하는 전륜(轉輪)(불교에서 석가의 가르침을 널리 펴 중생을 제도하는 일)왕으로 인식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석굴사원의 돔형지붕과 연꽃무늬 천개석은 바로 용문석굴 연화동의 아류일까? 곰곰이 뜯어보면 소재는 같지만 분명 다른 분위기다. 석굴사원의 균제미나 균형미와는 달리, 지나치게 크고 화려한 연화무늬 샹들리에는 조화감이 없다.
굴 가운데 모셔진 부처상은 전체 굴의 규모에 비해 너무 작아 보인다. 더구나 머리 부분이 소실되어 더욱 볼품이 없어 보인다. 석굴의 규모가 웅대하긴 하나, 석굴사원과 같은 우아한 선의 아름다움이나, 돌을 새겨 만든 날아갈 것 같은 가벼운 옷감의 느낌, 풍만하면서 아름다운 자태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 마군을 항복시키고 땅을(에) 가리켰다(손을 댔다)는 뜻
원어명 Bhmisparsa,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불이 취하는 수인인데,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왼손바닥을 펴고, 그 상태로 왼쪽 허벅지에 와있는 오른발위에 놓아서 그 손끝이 배꼽 앞에 쯤
위치하도록 편안히 놓으면 된다. 이 때 왼손바닥은 펴기도 하지만 엄지와 중지를 맞닿게 할 수
도 있습니다. 무슨 손가락과 무슨 손가락이 "맞닿는다"는 개념은 앞으로는 항상 이렇게 하자는
의미로, 끝과 끝이 정확하게 맞닿는 것이 아니라 엄지손가락의 바깥쪽에 살짝 겹치게 하여 약간
교차되도록 엇갈리게 댄다. 여기서 왼손의 모습은 상관없이 오른손의 모양이 바로 항마촉지인인
데, 오른손을 땅으로 드리우면서 손바닥을 자기쪽으로 두고 다섯손가락은 모두 펴주는 모양이다.
▲어쩌면 경주 석굴사원의 석공은 이곳에 다녀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혹자는 경주 석굴암의 모태가 이곳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단순히 불교문화의 전래와 관련되어 진 막연한 영향이 아니라 석굴암 공사를 이끈 석공은 아마도 낙양땅을 밟은 사람이었을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석굴을 지키는 금강역사의 허리 꺾임 선마저 이토록 흡사할 순 없을 거라고 한다. 당시 석공의 신분으로 중국에 들어와 낙양에 머물다 들어갈 수 있었을까?
당시 중국 불교계엔 수많은 신라 유학승이 고승, 대덕, 역경승, 주지로 활동하고 있었고, 원축, 승장, 신방, 지인, 현범, 무저, 혜초, 혜일 등 8고승이 담당한 역경의 비중이 현장, 의정 때에 번역된 총수량의 60%에 이르던 때였다. 한 마디로 재당 승려들의 판이었던 이때에 이들과 더불어 불교문화 관련 장인들이 함께하지 않았으리란 법이 없지 않은가?
그러면 결국 석굴암이 용문석굴 베껴간 것이니 별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용문석굴의 불상들을 보며 석굴암의 본존불을 떠올려 보면 보고, 여기처럼 푹푹 석벽을 파지 못한 조국의 장인들이 어떻게 돌을 깎아 인공의 석굴을 형성하였는지를 생각해 보면 분명히 그런 의문은 사라질 것이다. 석굴암은 바위를 파서 만든 인도나 중국의 석굴 사원과는 달리 360여 개 화강암 판석을 쌓아 올린 구조이다.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안에 불상을 모신 석굴 사원으로, 독창적인 건축과 빼어난 조각으로 유명하다. 전실과 주실, 그리고 두 공간을 연결해주는 통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승을 상징하는 전실은 사각형으로 부처의 세계를 상징하는 주실은 원형으로 형상화됐다.
이 석굴암을 통해 왜 우리는 우리의 문화에 감읍해야 하는지 먼 길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불교문화가 어떻게 용해되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게 한반도는 '중화'라는 거대한 용광로를 육로로 맞대고도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항마촉지인에 관한 고사
석가모니가 득도를 위해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그 때 제6천(天)의 마왕 파순이 권속을 이끌고 와서 갖가지 방해를 한다. 그것은 만약 석가모니가 성도하여 부처가 된다면 일체의 중생은 구제되고 마왕의 위력이 감퇴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마왕은 우선 세 미녀를 보내 교태를 보이면서 세속의 쾌락이 출가의 즐거움보다 더하다고 유혹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가 실패하자 악마세계의 모든 세력을 동원하여 힘으로 쫓아내려 하였다. 이 때 제1의 지신(地神)이 석가 앞에 나타나 도와주려 하였으나 석가모니는,
"두려워 말라. 나는 인(忍)의 힘으로 기어이 악마를 항복시킬 것이다"
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마왕은 석가에게 칼을 대며,
"비구야, 나무아래 앉아 무엇을 구하는가. 빨리 떠나라. 너는 신성한 금강보좌에 앉을 가치가 없는 자이다."
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에 석가모니는,
"천상천하에 이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다. 지신(地神)이여 이를 증명하라!!!"
고 하면서 선정인의 상태에서 오른손을 풀어 검지로 땅을 가리켰다.
선정인의 상태에서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이것이 바로 항마촉지인이다.
한자를 풀어보면 마군을 항복시키고 땅을(에) 가리켰다(손을 댔다)는 뜻이 된다.

키워드

  • 가격3,000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08.12.13
  • 저작시기2007.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0443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