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벌귀족사회의 동요-국사학습지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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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양계(兩界) 지방에서 병졸을 징발하는 데 날뛰었으므로 왕이 진숙·이주연·진경보·왕수 등에게 우군에서 2,000명을 떼어 통솔하고 동쪽 길로 떠나가면서 여러 성에 들러 선무 선무: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
하는 한편 적의 도당 도당: 불순한 사람의 모임.
을 수색하라는 임무를 주고 김부의에게는 좌군을 인솔하고 먼저 서경으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왕이 양부 대신을 불러 장차 출병할 것을 문의하니 김부식이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기를, “서경의 반란에 정지상·김안·백수한 등이 공모하였으므로 우선 이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서경을 평정할 수 없다”하니 여러 대신들도 그의 말에 깊이 찬동하였다. 그래서 정지상 등 세 사람을 부르는 한편 김정순에게 비밀히 지시하여 이들이 도착하는 대로 용사(勇士)들을 시켜 궁문 밖으로 끌어내어 사형에 처한 뒤에 왕에게 보고하였다.
[『고려사』권98, 「열전(列傳)」11, 김부식 ]
3. 묘청(妙淸)은 서경의 중인데 뒤에 이름을 정심(淨心)으로 고쳤다. 인종 6년에 일관인 백수한(白壽翰)이 검교소감으로서 서경을 분사 분사(分司): 서경에는 개경과 유사한 기구와 체제를 갖추었는데 이를 분사제도라 한다. 여기서는 서경의 관원으로 임명된 것을 말한다.
하자 묘청에게 말하여 스승으로 삼고 두 사람이 음양비술(陰陽秘術)을 칭탁함으로써 뭇사람을 미혹케 하였다. 정지상도 역시 서경 사람으로 깊이 그 말을 믿고 말하기를, " 상경 상경(上京): 여기서는 개경을 가리킨다.
은 기업(基業)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불타 남은 것이 없으나 서경은 왕기(王氣)가 있으니 주장께서 옮기시어 상경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 하고, 근신(近臣) 내시랑중 김안과 더불어 꾀하기를, "우리들이 만약 주상을 모시고 서경에 옮기어 상경을 삼으면 마땅히 중흥공신이 될 것이니 홀로 일신의 부귀뿐이 아니라 자손의 무궁한 복도 될 것이다."라 하여 드디어 입에 올려 서로 기렸다. 근신(近臣) 홍이서 이중부 및 대신(大臣) 문공인·임경청도 따라서 화동(和同)하여 마침내 왕께 아뢰기를, "묘청은 성인이요 백수한도 그 다음가는 사람입니다. 국가의 일을 일일이 자문하여 행하고 그 진청(陳請)하는 바를 들어주지 아니함이 없으면 정사가 이루어지고 일이 성취되어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두루 제관(諸官)에게 서명하기를 청하자, 평장사(平章事) 김부식, 참지정사 임원개, 승지 이지저만이 서명하지 않고 글을 올려 아뢰니 왕이 비록 의심은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역설하므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묘청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신 등이 서경의 임원역(林原驛) 땅을 보니 이는 음양가가 말하는 대화세 대화세(大華勢): 보통 명당보다 훌륭하고 뛰어난 대명당·대길지를 뜻하는 말이다.
입니다. 만약 궁궐을 세워 이에 이어(移御)하시면 천하를 합병할 수 있을 것이요,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다 신첩(臣妾)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드디어 서경에 행차하여 따라온 재추에게 명하여 묘청, 백수한과 함께 임원역 땅을 상보고, 김안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해서 독역(督役)이 매우 급하니, 때는 바야흐로 차고 얼어서 백성들이 심히 원망하고 탄식하였다. [『고려사』권127, 「열전」40, 묘청 ]
4. 서경의 부로(父老)인 검교태사치사 이제정 등 50인이 묘청 정지상의 뜻에 맞추어 표를 올려 존호(尊號)를 칭할 것과 건원(建元)할 것을 청하였다. 정지상 등이 왕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대동강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으니 이는 신용(神龍)이 침을 토해 내는 것으로서 천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일입니다. 청컨대 위로는 천심(天心)에 응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바람(望)에 따르시어 금나라를 타도하소서."라 하였다. 왕이 어찌하면 좋은가 물으니 이지저가 대답하기를, "금나라는 강적이니 가벼이 하지 못할 것입니다. "라 하니 왕이 그만두었다. 임원개가 상서하여 말히가를, "묘청 백수한 등은 그 간사한 꾀를 부려 괴탄한 말로써 민중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있사오며, 한 두 대신과 근시하는 사람들도 그 말을 깊이 믿어 위로는 임금의 귀를 어지럽히고 있사오니 신은 장차 불칙한 변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묘청 등을 잡아와서 저자 거리에서 목을 베어 재앙의 싹을 끊어버리소서."라 하였으나 왕은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우정언 황주첨이 묘청 정지상의 뜻에 아부하여 또 친제건원(稱帝建元)할 것을 주청(奏請)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13년(1135) 묘청이 분사시랑 조광, 병부상서 유감, 사재소경 조창언·안중영 등과 서경을 거점으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서경)부유수 최재, 감군사 이총림, 어사 안지종 등을 잡아 가두고, 가짜 승선 김신을 보내어 서북면병마사 이중과 그의 막료 및 여러 성의 수령을 체포해서 서경의 창고에 가두었으며, 무릇 개경인으로서 서경에 있던 자들은 귀천과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모두 구속하였다. 그리고 병사를 보내어 절령(嶺)길을 끊고, 사람을 보내어 여러 성의 군병을 욱박질러 징발하였으며, 근도(近道)에서 기르는 말도 약탈하여 모두 서경으로 들여 갔다. 이들은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건원하여 연호(年號)를 천개(天開)라 하며, 군대의 칭호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였다. [『고려사』권127, 「열전」40, 묘청 ]
5. 서경 전역(戰域)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사(王師 : 김부식)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전역이 낭(郎) 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 [ 신채호 조선사 연구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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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5.27
  • 저작시기20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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