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 심훈,우수 독후감,요약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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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 심훈,우수 독후감,요약자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있는『흙』의 계몽주의적 성격과는 그 본질부터가 다르다.
식민지시대 농촌 현실과 농민문학
서구 문학에서는 ‘농민문학’이라는 명칭을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우리 문학사에서는 1930년을 전후로 한 식민지시대, 해방 직후, 1970~80년대에 가장 뜨거운 이론적 논쟁이 펼쳐질 정도로 ‘농민문학’은 문학의 중심 영역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농촌 및 농촌문제가 갖는 한국적 특수성 때문이다.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 침탈로 말미암아 정상적인 농업의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지 못하고 만다. 그 결과 반봉건적인 지주-소작관계가 온존되면서 농업의 자본주의화가 지체되는 왜곡된 과정을 밟게 된다. 바로 이러한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농촌 및 농민문제는 민족문제의 핵심이 됐고 그에 대한 문학적 응전이 계속된 결과 우리 문학에서 농민문학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식민지시대는 당시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민층이었다는 점,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농촌이 황폐화되었고 농민들은 절망적인 기아 상태에 처해 있었다는 현실이 지식인들로 하여금 농민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촉발하기에 이른다. 농민문학에 대한 이론적 접근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대표적으로 중농주의 계열의 농민문학론과 프로문학 계열의 농민문학론, 그리고 개량주의적 계몽사상에 기초한 소박한 농민문학론을 들 수 있다.
1920년대 「조선농민」을 중심으로 전개된 중농주의 계열의 농민문학론은 도시와 농촌의 대립적 인식을 바탕으로 도회주의를 반대하는 향토주의적 계몽문학의 속성을 지녔다. 이는 당시 농민들의 사회경제적 여건을 무시한 채 단순히 귀농을 주장하는 양상을 드러내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농민작가를 발굴하고 다양한 형식실험을 통해 농민대중과 직접적으로 마주했던 이들의 실천적 노력은 주목할 만한 성과로 간주할 수 있다.
심훈의 『상록수』는 1930년대 초 농민운동에서 계급운동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요구된 시대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광수의『흙』과 심훈의『상록수』로 대표되는 계몽주의적 농민문학론은 농민의 계급적 속성이나 토지문제와 같은 농촌의 본질적인 문제보다 지식인의 귀농의식이나 교육사업, 농촌의 환경개선 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식민지시대에는 농민문학의 전성기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여러 관점에서 당대 농촌현실과 농민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문학적 대응이 있었다. 이론적인 영역뿐 아니라 창작 분야에서도 많은 성과가 있었다. 김유정의 해학적인 농민문학, 이기영의 『고향』으로 대표되는 카프의 농민문학, 심훈, 이광수, 이무영의 계몽적 농민문학, 김정한, 박영준의 사실주의적 농민문학 등 다양한 경향의 농민문학 작품들은 여러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우리 농촌과 농민 현실에 대한 문학적 수용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성과로 평가할 수 있겠다.
▣ 심훈의 생애와 작품
19019월 12일 서울 노량진에서 심상정의 막내로 출생. 본명은 대섭(大燮), 호는 소년시절에는 ‘금강생’, 중국 유학 때는 백랑(白浪), 1926년 이후 훈(熏)을 쓴다.
1915서울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17경성 제일고보 재학중 이해영과 결혼한다.
1919경성 제일고보 4학년 때 3.1운동에 가담하여 3월 5일 헌병대에 체포, 투옥. 7월에 집행유예로 출옥. ‘어머니께 올린 글월’이 옥중에서 쓰여져 밖에 알려진다.
1920문학수업에 전념. 변명(變名) 가장하고 중국으로 유학 길을 떠난다.
1921북경, 남경, 상해를 거쳐 항주 지강대학 극문학부에 입학한다.
1923중국에서 귀국하여 최승일, 이경손, 안석주, 이승만, 김영팔, 임남산 등과 ‘극문회’란 연극 단체를 조직한다.
1924동아일보 기자로 입사. 번안소설 『미인의 한』의 후반부를 번안하여 「동아일보」에 연재. 이해영과이혼한다.
1925일본 작가 尾崎紅葉의 『금색야차』를 조일제가 『장안몽』으로 번안한 것을 영화화할 때 이수일 역의 후반부를 대역한다.
1926‘철필구락부사건’ 관련으로 「동아일보」를 그만 두게 된다. 최초의 영화소설『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27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경도 일활 촬영소에서 村田實 감독의 지도로 영화 공부를 하게 된다.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먼동이 틀 때」를 원작, 각색, 감독하여 10월에 '단성사‘에서 개봉
1928조선일보사에 입사. 시 「독백」, 단편 「기남의 모험」을 「새벗」에 발표한다.
1929단편 「오월비상」을 「조선일보」에 발표
1930장편 「동방의 애인」을 「조선일보」에 연재했으나 일경의 검열로 중단된다. 다시 장편 「불사조」를 「조선일보」에 연재했으나 역시 게재 정지 처분을 받게 된다.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 19세의 안정옥과 결혼한다.
1931「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 발표. 조선일보를 퇴사하고 경성방송국에 문예 담당으로 취직했으나 곧바로 그만 둔다.
1932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낙향.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창작에 전념하고 장남 재건이 출생
1933당진 본가에서 장편「영원의 미소」 집필. 5월에 탈고해 「조선일보」에 연재. 단편 「황공의 최후」를 쓴다. 조선중앙일보사 학예부장으로 취직. 4개월 뒤 다시 낙향한다.
1934장편 「직녀성」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 이 소설의 고료로 고향 부곡리에 자택을 짓고 ‘필경사’라고 이름 붙인다. 차남 재광 출생
1935「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모집에 『상록수』가 당선. 상금 5백원 중 일부를 나누어 상록학원을 설립한다.
1936『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한다. 「사해공론」이라는 잡지에 펄 벅의 『대지』를 번역하여 소개. 3남 재호가 출생. 『상록수』 출판일로 한성도서주식회사 2층에 기거하다가 장질부사를 얻어 대학병원에 입원했으나 9월 16일 8시 그 곳에서 요절한다.
단편「황공의 최후」가 뒤늦게 발표됨.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우승하였다는 신문 호외에 감격하여 그 뒷면에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즉흥시를 썼던 것이 마지막 글이었다.
1949유고 시집 『그날이 오면』이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
1966탐구당에서 『심훈전집』이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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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6.02
  • 저작시기2008.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67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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