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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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환경신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사랑스럽고 기쁜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는 그 다음에 과학 기술의 실천과 관련된 활동의 규범적 원리들을 제시한다. 문화적인 적절성, 계속적이고 정확한 정보의 흐름, 열린 의사소통, 인간과 물질 자원을 돌보기 위한 청지기직, 인간과 나머지 피조물 간의 조화로운 관계, 인간과 자연에 대한 정의, 이웃과 자연에 대한 사랑의 보살핌, 과학 기술적인 생산품들의 믿음직스러움에 대한 신뢰 등이 그것들이다. 그는 이렇게 결론 짓고 있다.
여기에 제시된 규범적 원리들은 매우 다른 방향을 지향한다. 바른 관계, 정의, 돌봄, 조화, 열린 의사소통 등의 맥락에서 나타나는 것은 문화적인 발전과 성장에 대한 지향이다. 이런 원리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강의 왕국을 지향하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에 제시된 모든 규범적 원리들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그것들은 한 가지 규범인 사랑의 모든 측면이다그것들은 서로 분리된 별도의 원리들이 아니다. 하나를 지키려면 모두 다 지켜야 한다.
Albert J Fritsch, S J는 환경 정의로 이끄는 과학 기술의 다섯 단계를 제시한다. 첫째, 과학 기술은 과학 기술은 인간의 생존과 개량에 필요하다. 둘째, 응용된 과학 기술의 효율성을 실현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런 과학 기술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셋째, 재검토, 비판적 성찰, 재발견의 기간이 있어야만 한다. 넷째, 무기력의 순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부인과 변명과 탈출로 회귀하는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사람들을 진정으로 섬기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완전한 결과를 가져오는 과학 기술은 인간이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이며 똑같은 행위로 지구가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구속적이며 활기 있게 하는 사역이 진정한 삼위일체적인 행동을 보여 준다.
위의 두 가지 분석은 책임 있는 과학 기술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Monsma가 지적한 대로 과학 기술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논의해야 한다. 내 생각에는 Schuurman의 분석이 여기에서 우리에게 어떤 통찰력을 준다. 왜냐하면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정확하게 현재의 갈등의 영적인 뿌리들을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Schuurman은 Ellul과 함께, 실증주의자나 실용주의자들이 과학 기술을 인간의 모든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미래의 위대한 지구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중립적인 도구로 찬양하는 것에 대해 거부한다. 그는 현대의 문화 속에서 과학 기술의 파괴적인 탈선의 원인에 대한 Ellul의 진단을 받아들인다. 그 두 사람은 모두 과학 기술의 자율성의 개념이 그런 탈선의 직접적인 원인임을 지적하였다. Ellul에게는 현대의 과학 기술의 본질이 그것의 자율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과학 기술이 근본적으로 악하고 비인간적이다. 그는 자율성의 개념의 더 깊은 근원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Schuurman은 자율성이 과학 기술에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중세 후기의 근대인의 종교적/영적 가정이라고 주장한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의 자율성의 사상이 서구 문화 전반을 지배했다는 사실이 흔히 공감대를 얻고 있다. 서구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그들 자신의 우월성의 개념을 자화자찬격인 자율성의 사상 위에 기초를 두려고 시도했으며 과학에서 그것을 실현하고 과학 기술에서 그것을 확증하려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대신에 그들 자신의 이성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데카르트와 같은 사상가들의 철학의 결과도 인간을 서구 문화의 중심적인 위치에 두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계몽주의와 더불어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사상은 문화 전체에 퍼졌다. 계몽주의 시대의 사람들은 세상을 이성의 빛에 의하여 이해하려고 애썼을 뿐만 아니라 이성의 명령에 따라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자율적인 이성을 그들의 도구로 선택함으로써 그들은 마침내 자유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려고 Schuurman은 인간의 자율성의 문제와 그에 따른 문화의 세속화를 먼저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현대 서구 문화의 문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율성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적인 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피조물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이다. 인간의 자율성은 절대적일 수 없다. 인간은 여느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 기술 속에 있고 그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일정하게 주어진 물질과 구조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다. 인간은 문화가 발전되어야 하는 방향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화적인 위기의 가장 깊은 원인을 보고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더 나은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길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아닌 길이다. 그것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고 움직인다는 것을 의식하는 길이다. 그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책임 있는 청지기직을 위해서 존귀와 영광으로 관을 씌우신 분이시다. 우리는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가능성들과 경제적인 힘이 우리의 문화를 지배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영적인 가치들이 과학 기술로 하여금 인생을 수종들게 해야 한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혼란은 인간의 정신이 잘못 지향될 때 종종 발생한다. 우리의 모든 과학 기술적인 활동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산 제사로 드리는 대신에 근시안적으로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어 피조된 실제 속에서 그것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근시안적인 안목과 상대적인 성공에 대한 단기적인 척도에 대한 만족감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Schuurman의 결론은 이와 같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보다 넓은 조망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 서구 문화는 이런 초월적인 실재에 대한 개방을 통해서만 다시 한 번 의미 있는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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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46페이지
  • 등록일2008.08.02
  • 저작시기2008.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7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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