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유럽의 좌익과 우익] 독후감 자료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당
1. 나치즘이란?
2. 나치즘 등장의 배경
3. 히틀러의 등장
4. 사상적 영향
1) 반합리주의 사상
2) 반공산주의
3) 사회주의 방식 차용
4) 인종주의와 군국주의

●마르크스의 주장
1. 마르크스주의의 등장
2. 변증법적 유물론
3. 역사발전에 대한 새로운 인식
4. 과학적 사회주의의 형성
5.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평가

□인물탐구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
◉히틀러 (Adolf Hitler 1889∼1945)
◉무솔리니 (Benito Mussolini 1883∼1945)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본문내용

되었던 나치스의 재건에 힘써 1930년 9월 총선거에서는 나치스가 600만표 이상을 득표, 독일 제2당으로 부상하였다.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P. 힌덴부르크에게 패배하였으나, 같은 해 7월 총선거에서 나치스가 승리, 제1당이 되었고 1933년 1월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2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을 억압하고 반대파에 대한 대탄압을 강행하였으며, 이어 총선거에서 승리한 뒤 의회에서 전권위임법을 성립시켜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이듬해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총통 겸 총리로 취임하였다. 1935년 베르사이유조약의 군사제한조항을 폐기하고 병역의무를 다시 도입하여 군비확장에 의한 실업극복에 성공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독일 민족 생존권수립의 정책을 폈는데 1935년 자르의 영유권 회복,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및 같은 해 9월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 1940년 6월 프랑스를 정복한 뒤 이듬해 소련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였으나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 같은 해 5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였다. 유태인 말살정책을 고집하여 수백만의 무고한 유태인을 학살하였다. 악의 화신으로 암살될 뻔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1945년 4월 29일 소련군 포위 아래 베를린에서 E. 브라운과 결혼한 뒤 이튿날 총통관저에서 자살하였다. 저서로 《나의 투쟁(1925~26)》 《제2의 책(1961)》 등이 있다.
무솔리니 (Benito Mussolini 1883∼1945)
이탈리아 정치가, 파시즘 창시자. 프레다피오 출생. 무정부주의자이며 반교권적(反敎權的)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 아래 소년시절을 보냈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02년부터 2년여 동안 스위스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회주의운동을 체험하고, 독서를 통하여 G. 소렐·L.A. 블랑키·F.W. 니체·V. 파레토 등 여러 사상가들의 사상과 접하였는데, 이는 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귀국하여 병역에 복무한 뒤 각지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지방 사회주의신문에 기고하였다. 1910년 로마니아지방에서 《계급투쟁(La Lotta di Classe)》지(誌)를 발간, 반교권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를 선전하고, 리비아전쟁이 일어나자 반전운동을 선동하여 5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1912년 당대회에서는 우익개량주의자의 추방연설로 각광을 받아 일약 지도부에 선출되었다. 얼마 후 당기관지 《전진(Avanti)》의 편집장(사실상의 당위원장)이 되자, 그의 지도 아래 집행부와 당기관에서 비타협적 좌파가 다수파가 되었고, 이 기관지는 생디칼리스트를 포함한 혁명적 좌파의 논단이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1914)이 일어날 당시 그는 당의 방침대로 절대중립의 입장을 옹호하였으나, 전국(戰局)의 전개와 함께 전쟁을 통하여 혁명을 전망하는 생디칼리스트의 논리에 뜻을 같이하고, 1914년 10월 참전론을 당기관지에 발표하여 당에서 축출당하였다. 전후 참전파와 반전파의 반목·대립이 격화하는 1919년 3월에 그는 일부 참전세력과 함께 밀라노에서 <전투자동맹(Fasci di Combattimento)>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은 1920년 말부터 사회당에 적대하는 세력으로서 급속히 팽창하여, 1921년 가을에는 파시스트당으로 개조되었다. 1922년 10월 파시스트 의용군의 로마 진군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이후 20년 이상이나 총리직에 있었다. 당초에는 연립정권으로 출발하였으나, 뒤에 파시즘 이외의 모든 정당과 조직을 해체하고 일당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1925∼26). 이 체제의 정점에서 모든 권력을 장악한 그는 1935년 10월 에티오피아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에 항의하는 국제여론과 국제연맹에 대항하기 위하여 독일과의 접근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1936년의 에스파냐내전 개입은 이를 가속화시켜 히틀러와 공동전선을 형성하였다. 1937년 국제연맹 탈퇴, 1939년에는 독일과 군사동맹을 맺기에 이르렀다. 1940년 6월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나 1940년 10월에 시작된 그리스침공의 패배로 인하여 독일에의 종속은 결정적이 되었다. 패색이 짙어가는 1943년 7월,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여 그란사소의 산중에 구금되었다. 그 해 9월 독일군에게 구출되어 북이탈리아에 나치스 괴뢰정부(이탈리아사회공화국)를 수립하였으나, 1945년 4월 유격대의 봉기로 나치스·파시스트의 지배는 끝이 났고 스위스로 도피하려던 무솔리니는 코모 호반(湖畔)에서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에스파냐 군인·정치가. 갈리시아의 엘페롤 출생. 톨레도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임관되었다. 1920∼1926년 모로코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1927년 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1935년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36년 인민전선정부가 수립되자 반정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으며, 반란군의 총사령관 겸 정부주석에 올랐다.
인민전선은 노동자·농민·중간층의 제휴를 기초로 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한 우익세력의 공격이 1936년 7월에 시작되어 <에스파냐내전>이 일어났다. 내전은 의외로 장기화되었고, 1939년 3월에 마드리드가 함락됨으로써 인민전선의 패배로 끝났다. 반란군은 F. 프랑코 장군이 이끌었으며 내전이 끝난 뒤 프랑코의 주도 아래 파시즘 형태의 일당독재국가가 성립하였다. 독일·이탈리아 파시즘 진영의 지지를 얻어 내란에 승리한 그는 팔랑헤당의 당수 및 국가주석(총통)이 되어 파시즘국가를 수립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뒤인 1946년, 국제연합(UN)은 <프랑코 파시스트정부>를 UN에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프랑코시대는 4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 동안에 프랑코는 조금씩 파시즘체제를 완화시켰고, 동서냉전에 편승하여 1955년 UN에 가입함으로써 국제적 고립상태에서 벗어났다. 에스파냐는 프랑코의 <국가 원수 계승 법>에 의해서 왕국이면서 왕은 없고 프랑코 자신이 종신원수로서 후계자도 지명할 수 있게 한 불합리한 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1975년 11월에 프랑코는 죽고 알폰소 13세의 손자 후안 카를로스가 즉위하였다.

키워드

좌익,   유럽,   우익,   레닌,   히틀러
  • 가격1,3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8.08.12
  • 저작시기2007.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7590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