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평론] 여운형, 그는 누구였는가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내용

은 여운형이 기회주의자이며 자신의 정치적 재부에만 관심이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몽양은 기회주의적이라는 그 노선으로 인해 그가 가질 수 있었던 영예를 모두 저버렸다. 심지어 그는 어느 한 쪽도 선택하지 않았던 그의 정치적 노선으로 인해 광복 이후 갈라진 두 국가 모두에서 수십년간 잊혀져왔다.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가 죽은 지 반세기가 지났고 이념대립은 옛말이 되어버린 오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몽양의 업적은 객관적으로 평가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그는 그의 노선으로 인해 당시에도 지금에도 ‘공식적으로’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운형은 중도적이며, 자칫 잘못하면 기회주의자로 보일 수 있는 모호한 행보를 지속해왔던 것일까. 그는 분단된 조국이 초래할 수 있는 분란에 대해 미리 인지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외세가 개입했다는 점, 국내상황이 평화적인 타협을 이루어 내기 어려웠다는 점, 그와 김규식의 세력기반이 견고하지 못했다는 점으로 인해 결국 실패하고 만다. 여운형 선생에 대해 조사하면서 줄곧 들었던 생각은 몽양정도의 인물이라면, 좌우합작이 당시 상황으로써는 지극히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운동이었다는 것을 미리 인지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가 광복직후 어느 한쪽의 이념에 손을 들어주었다면, 아마도 단일 통일은 더 쉽게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통일 직후 그의 세력은 일시적이었으나 단연 독보적이었으며 몽양 자신도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이였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중도적 노선을 통해 좌우를 모두 흡수하는 ‘평화적’인 노선을 택한 것은 여운형 개인으로서는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아마도 그 원인은 외세의 힘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좌파와 우파가 세계의 양대 축이었던 시대에서 여운형은 이념을 넘어서 민족을 통합함으로써 ‘여운형주의’와 같은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국가 건설을 원했던 것이다.
여운형이 암살당하기 전까지 그는 납치부터 폭탄테러까지 끝없는 위협을 받고 있었다. 몽양 선생은 단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노력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염원하던 단일국가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광복 무렵에 그가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국가적 이념을 떠나서 객관적으로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목록>
1) 강준식,『혈농어수 : 몽양 여운형 일대기』,아름다운책,2006
2) 이정식 최상용 등저, 『여운형을 말하다』,아름다운책,2007
3) 윤무한, 『인물대한민국사』, 2006
4) 윤희진, 『한국사 인물이야기』, 2006
5) 정경모, 『찢겨진 산하 : 김구, 여운형, 장준하가 말하는 한국 현대사』,한겨레신문사, 2002
4) 정병준, 「진보적민주주의자 여운형」,『인물바로보기』,통권4호,2000
5) 정병준,『몽양 여운형 평전』,한울,1995
6) 「한국의 인물, 여운형」,『한국학 홈페이지』,

키워드

  • 가격1,0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8.08.29
  • 저작시기2008.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77397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