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주거의 역사 및 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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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주거의 의미와 기능

Ⅰ. 원시주거 (原始住居)

Ⅱ. 삼국시대 (三國時代) : 고대 국가의 형성

Ⅲ.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Ⅳ. 발해시대 (渤海時代)

Ⅴ. 고려시대 (高麗時代)

Ⅵ. 조선시대 (朝鮮時代)

본문내용

을의 예
/ 직계손에 의한 가계 + 제사의 계승 + 적장자를 우대하는 상속제도가 일반화
→ 씨족마을이 형성되기 시작
2. 씨족마을의 공간구성
1) 씨족마을에서의 분파과정
씨족마을은 마을을 개창한 입향조로부터 시작된다.
종법제가 확립된 이후, 가계는 적장자(嫡長子)로 계승 → 집 또한 적장자의 후손으로 승계
딸 - 시집으로 출가하여 출가외인(出嫁外人)
차남 이하의 아들 - 분가(分家)하여 독립된 주거 / 거처할 가옥과 토지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음 → ∴ 대개 같은 마을에 입지 → 동성동본의 씨족마을 형성
근촌분파(近村分派) - 마을터의 한계로 자손들을 수용하기 어려운 경우 가까운 곳에 거처를
정하여 새로운 마을을 만듦 → 기존 마을과의 연대감 유지
같은 마을이라는 인식 - 마을 이름, 도로 구조, 마을 내부의 주택배치에도 균형
주거의 독립이 가족의 분리를 의미하지는 않음.
분가보다는 ‘세간낸다’ 또는 ‘살림낸다’의 표현이 더 흔하게 사용
분가 이후에도 본가(本家)와 분파가, 각 분파가 사이에는 가족관계 또는 친족관계가 유지 -
협력적 생산, 자녀교육, 공동조상의 제사, 제실의 건립, 문회의 개최, 족보의 간행 등 / 친족간의
혈연적 유대를 유지함으로써 생활공동체를 이룸
2) 씨족마을의 주거배치
친족간의 위계(位階) - 종가와 파가의 배치관계에 투영
대종가는 마을입구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주산에 가깝게 위치
- 풍수적 위계 : 조산(朝山)-안산(案山)-혈(穴)-명당(明堂)-진산(鎭山) 등
지형상으로도 가장 높은 곳 or 지형에 따라서는 마을의 중심과 주변의 위계관계 (지손(支孫)들의 주거는 종가보다 바깥쪽으로, 보다 낮은 쪽으로, 보다 주변으로 확산)
씨족마을 - 동성동본의 친족들 + 외거노비의 주거(가랍집, 호지집) + 소작인들의 주거(마을의
입구 근처 or 마을 중심에서 먼 외주(外周)부에 집단적인 영을 차지 / ‘아랫마을’ 혹은 ‘바깥마을’
등의 용어를 사용)
조선시대 씨족마을의 공간구성 - 성리학적 사회질서와 생활문화를 반영
조상숭배와 가례를 중시하는 생활규범 + 사대부들의 농민지배 + 부계친 중심의 친족체계와 위계
+ 친족의 혈연적, 지연적 유대와 결속 + 유교적 교육과 생활문화 등
3. 사대부 주거의 개별적 전개
조선중기 이후 / 사대부들의 주거 - 규범적 형식에서 벗어나 개성을 추구
지역과 계층의 규범적 형식을 골간 + 개인적 취향이나 요구를 반영 (개별적 변형)
주로 사랑채에서 나타남 - 16세기 이후 / 종법질서의 확립 & 성리학적 생활문화의 정착 →
가장권(家長權) 강화 & 주거 내에서 가장(家長)의 역할 증대 → 사랑채 영역의 확대 & 기능 분화
1) 사랑채의 확대
조선 전기 까지 / 사랑채 - 손님 접대하는 작은 부속건물에 불과
ex) 양동의 손동만 가옥(서백당) -사랑은 본채의 모퉁이, 1칸의 방과 마루(小)
내외법(內外法)의 정착 → 안채와 격리된 가장(家長)의 공간 필요
조선 중기 이후 / 士大夫家 / 사랑채 안에 넓은 사랑대청이 수용
사랑대청 : 가장의 여름철 기거공간 + 접객 & 제사를 치루는 의례공간 (공공적 성격)
家廟 건립의 일반화 이후 -사랑 / 제례의 중심장소로서 많은 사람을 수용할 필요 발생
사랑채의 확대 ← 사랑공간의 기능 분화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작은 사랑방 - 결혼한 아들이 있을 경우 거처하는 공간
감실 or 빈소방 등 - 제례와 관련된 공간이 수용
시중드는 하인을 위해 수청방( or 복직이방, 청지기방)이 설치
규모가 클 경우, 겹집화 되기도 함
겹집 : 칸의 배열을 두 줄로 만든 것 /같은 건물길이에서 홑집보다 두 배의 공간 수용
건물의 규모 확대 + 마당을 포함한 사랑채 영역이 독립화해 가는 경향도 볼 수 있음
2) 권위적 장식성의 추구
사랑채의 형태적 차별화
① 건물고 - 건물고를 높이기 위해(장중한 모습)서는 기단을 보다 높게 쌓고,
누하주를 두어 바닥을 들어 올리기도 한다.
② 지붕 - 보통 팔작지붕으로 하여 독립된 건물처럼 보이게 하는 수법을 사용
사랑채에 누정(樓亭)을 둠 - 일반적 경향
장중한 외관의 표현 + 넓은 시야를 제공
하인의 행위를 감독 + 마당에서 올려다 보는 시각적 효과 (우러러 봄)
누정과 더불어 조원수법 발달 - 근경이나 원경을 넓게 조망하기 위해
사랑채의 장식성 - 가장의 권위와 품격을 표현하는 수단
사랑채의 기둥 - 대부분 두리기둥(圓柱) /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
- 남자의 상징인 양(陽), 양의 상징인 하늘의 상을 취함
기둥머리 - 익공장식, 화반대공, 충량, 외기반자, 계자난간 등을 가설(내부장식)
대청과 방 사이 - 불발기 창 + 겹창(밖여닫이-세살창/소박함, 안미닫이-고급문양의
살창/아름다움을 표현)
대청 - 사분합의 들어열기창 / 사대부가의 품격
3) 별당형 사랑채의 발달
별당형 사랑채 발달 - 조선중기 이후 사대부가의 개별적 성격을 보여주는 시대적 특징
사랑채의 기능 분화 & 확대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임
제사, 학문, 접객, 수양 등의 복합적 기능을 수용하게 되자 → 공간상의 한계 → 수용
하기 어렵거나 보다 독립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기존의 사랑채와는 별도의 별당의 건립
별당의 기능을 분류 - 제실형, 서재형, 누정형으로 분류 가능
조선후기 / 조원 + 정자의 형태 → 더욱 자유분방
참 고 문 헌
- 박언곤. 『한국건축사강론』 문운당, 1998
- 이왕기, 『고대 한국, 중국 건축관계사 연구(Ⅰ)』, 건축역사연구 4, 한국건축역사학회, 1993
- 이왕기, 『고대 한국, 중국 건축관계사 연구(Ⅱ)』, 건축역사연구 5, 한국건축역사학회, 1994
- 고고학연구소. 『조선의 구석기 시대』 1977
- 대한건축학회, 『한국 건축사』, 1996, pp36-38.
- 장경호, 『우리나라의 난방시설인 온돌(구들) 형성에 대한 연구』, 고고미술 165호, 1958,
한국미술사학회
- 이기백, 『한국사 신론(개정판)』, 일조각, 1985.
-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 출판사, 1993.
- 김동현. 『한국목조건축의 기법』. 발언. 1995.
- 장경호. 『한국의 전통건축』. 문예출판사. 1994.
- 이화선, 『조선 건축사』, 발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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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9.28
  • 저작시기20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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