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세]4세기 국제질서 및 신라의 변화와 대응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머리말

1. 신라의 국가 성립
1) 신라의 정치적 발전
2) 신라의 팽창
3) 삼국 통일
4) 신라의 발전

2. 4세기 후반 국제관계와 신라의 내부 통합 강화
1) 4세기 중.후반 신라와 왜의 관계
2) 고구려와 백제의 갈등과 신라의 대응
3) 신라의 내부 통합 강화

3. 4세기 전반 신라와 가야의 관계
1) 3세기 후반 신라와 가야의 역관계 변화
2)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이 일어난 시기와 그 배경

요약 및 결론

본문내용

사로국에 의지하였지만, 얼마 안있어 신라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399년에 금관가야 중심의 가야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임나가라가
) 金泰植, 1994 「廣開土王陵碑文의 任那加羅와 '安羅人戍兵'」『韓國古代史論叢』6, 62∼86쪽
왜와 연합한 인상을 전하는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은
)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廣開土王陵碑)"
이를 방증하는 하나의 자료로서 유의된다고 하겠다. 한편 사로국에게 패한 포상팔국의 경우도 역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왜나 백제와의 연결을 적극 모색하였을 것이다.
364년 무렵에 가라(금관가야)와 더불어 안라(함안), 탁순 등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서 통교를 청한 바 있는데, 이 무렵 백제는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여 가야세력과의 연합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가야세력으로서도 포상팔국의 난 이후 강화된 신라의 압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백제나 왜와의 연결을 적극 모색하였던 때였다. 한편 4세기 전반에 가야세력들이 왜와의 연결을 모색하려고 시도한 것처럼 왜 역시 여러 가야세력과의 연대가 절실하였던 바 있다. 3세기 중반 단계에 왜는 주로 김해지역을 통하여 여러 가지 물품을 수입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포상팔국의 난을 계기로 신라의 금관가야에 대한 간섭이 심해지면서, 그곳을 통하여 철과 사치품, 위세품 등 각종 물품을 수입하기가 그리 수월치 않았을 것이다. 왜왕권의 입장에서 철이나 기타 각종 물품을 제대로 수입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권력기반이 약화될 수도 있는 바, 안전한 수입루트의 확보는 무엇보다도 시급한 사안이었다. 시일이 지나면서 금관가야가 신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왜와의 연결을 적극 모색하였기 때문에 왜와 금관가야의 교역이 다시 활발해졌겠지만,
) 김해 대성동고분에서 발견된 다량의 일본제유물은 이 사실을 시사하는 고고학적인 유물로서 주목되는 바이다.
그러나 이전처럼 왜가 전적으로 금관가야에만 의존하는 것은 피하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김해지역 이외에 새로운 교역루트의 개척을 추진하였고, 이 와중에서 아라국 등을 비롯하여 여러 가야세력과의 접촉을 확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367년 백제와 왜의 통교를 매개한 가야세력이 금관가야가 아니라 卓淳國이었다는 점이 이와 관련하여 유의된다.
더구나 4세기 중·후반 무렵에 왜에서 금은제품의 수요가 증대하였다고 짐작되는데, 처음에 왜는 신라에서 금은제품을 수입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백제에게 접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67년 백제와 왜와의 통교 배경의 하나로서 이점이 유의된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다 자세하게 검토할 예정이다.
요약 및 결론
4세기 단계에 왜가 신라를 자주 침략하였다. 이때 왜가 신라를 침략한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금은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고 추정된다. 이에 신라는 왜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360년대에 고구려가 백제를 압박하자, 백제는 가야세력과 왜, 동진과 통교하고, 나아가 신라와 화친조약을 체결하여 대응하였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의 직접적인 침략위협을 받지 않았지만, 그러나 백제와 화친하면, 그의 침략위협을 걱정하지 않고, 군사력을 왜의 침략에 집중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와의 우호를 과시함으로써 왜의 침략의지를 약화시키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요구에 응하였던 것이다.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373년 독산성주의 망명사건을 계기로 소원해졌다.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에게 대패한 고구려는 백제를 협공하기 위하여 신라와의 연결이 절실한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신라가 백제와 소원해진 틈을 타서 신라에 접근하였다. 이때 신라 역시 백제가 가야세력·왜와의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들 연합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고구려와의 연결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두 나라는 377년 무렵에 화친조약을 체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럼으로써 고구려와 신라가 한편이 되고, 여기에 백제-왜-가야 연합세력이 맞서는 국제질서가 성립되었다.
4세기 중·후반에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서로 연합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였던 현실은 신라가 경상도지역을 대표하는 강력한 국가체로 성장하였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는 4세기 전반에 신라가 가야세력을 압도함으로써 가능하였다. 280년대에 한군현의 한(韓)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구야국(금관가야) 중심의 교역체계가 상당히 위축되었다. 이 틈을 타서 사로국이 낙동강방면으로 진출하여 구야국을 압도하고 낙동강 수로를 통제하였다. 변한의 중심체였던 구야국의 약화는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반에 경남 해안지역에 위치한 포상팔국의 반란을 결과하였고, 반란을 진압하는 와중에서 가야세력에 대한 신라의 정치적 간섭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가야세력은 신라의 압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왜나 백제와의 연결을 적극 모색하였고, 왜 역시 새로운 교역루트의 개척을 위하여 금관가야 이외의 가야세력이나 백제와의 연결을 도모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4세기 후반의 국제관계는 포상팔국의 난 이후 신라의 가야세력에 대한 압박, 이에 대한 가야세력, 왜의 외교적 대응에서 연원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신라는 이처럼 4세기 전반부터 낙동강 수로를 이용한 중계무역을 통하여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나아가 4세기 후반∼5세기에 걸쳐 신라의 핵심지배세력인 훼부 소속 김씨왕실은 사훼부를 통합하여 그들의 권력기반을 확장한 다음, 부체제 운영에서 국왕의 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는 방향으로 집권력을 강화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지방민을 효율적으로 요역에 징발하거나 그들에게서 여러 가지 물자를 수취하는 통치시스템을 보다 체계화하였다. 4세기 후반 대외교섭에서 공식적으로 '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한 점, 대수장(大首長)을 의미하는 마립간(麻立干)을 왕호로 사용한 점, 그리고 핵심지배세력이 대형의 적석목곽분을 무덤으로 조영하였던 측면 등은 신라가 4세기 후반부터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내부의 통합을 제고시키면서 성장하였던 사실을 대변해주는 주요 징표들로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 가격2,800
  • 페이지수21페이지
  • 등록일2008.09.28
  • 저작시기2008.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8158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