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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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백범일지』 서문의 백범 출간사를 읽고...

『백범일지』 1장 황해도 벽촌의 어린시절을 읽고...

『백범일지』 2장 시련의 사회진출을 읽고...

『백범일지』 3장 질풍노도의 청년기를 읽고...

『백범일지』 4장 방랑과 모색을 읽고...

『백범일지』 5장 식민의 시련을 읽고...

『백범일지』 6장 망명의 길을 읽고...

본문내용

었다. 여기서 김구 선생님은 기약 없는 15년형을 선고받게 되신다.
이번 장에서는 김구선생님의 신교육에 힘쓰시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나라의 해방을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한다고 느끼신 것이다.
15년형의 직역을 선고 받으신 김구 선생님은 징역이 확정되고 얼마 후에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이 되셨다. 당시 같이 형을 받은 동지들이 같이 이감되어 그나마 위로가 된 김구 선생님은 수감 생활 중에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으시고 일본 순사의 회유 에도 강력히 항거 하시며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 하셨고 일본의 법률을 질타하시며 순사들에게 호통을 치셨다. 김구 선생님과 그의 동지들은 감옥의 불합리한 대우에 기지를 발휘하여 감옥 생활을 점점 개선해 나아간다. 김구 선생님과 같은 방에 수감되어 있던 자들은 독립운동을 하며 각 조직의 간부급으로 있었는데 그들의 됨됨이가 소위 도적과 다를 바 없고 전투에 대한 지식이 전무 한 것을 한탄하며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시게 된다. 그러던 중 또다시 일제의 애국지사 탄압이 시작되어 김구 선생님의 형량은 17년으로 증가 하였다. 감옥에서의 생활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다. 일제 강점기의 감옥 상황은 더욱 처참 하였다. 감옥의 옷은 판결 전에는 자기의 의복을 입거나 청의를 입는데 기결이 된 후부터는 빨간 의복을 입게 된다. 감옥의 식사는 비 영양적이고 양도 작아서 생활에 매우 불편을 느꼈다. 그나마 사식이 허용되는 이는 덜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배 골음을 느끼게 된다. 감옥에서는 이야기도 해서는 안 되는 데 만일 이야기를 하다가 들키게 되면 간수들 에게 곤욕을 치르게 된다. 김구 선생님도 최명식 군과 이야기를 하다 사토라는 간수에게 발각이 되어 곤욕을 치르시어 봉충이가 되었다. 옥중에서의 생활은 계절에 따라서 매우 힘이 든다. 여름에는 좁은 공간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생활하려하니 힘이 들고 겨울에는 추위에 동상이 걸려 힘든 생활을 하였다. 간수들의 횡포도 만만치 않아서 여름에는 문을 닫아버리고 겨울에는 문을 여는 등의 횡포로 죄수들을 괴롭히곤 했다. 김구 선생님의 감옥의 실태를 몸으로 느끼면서 후에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면 이와 같은 행위가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신다. 김구 선생님은 우연히 김진사라는 사람을 만나신다. 김진사는 활빈당의 두령으로 김구 선생님은 활빈당의 조직력을 듣고 우리의 군대도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쯤 메이지와 그의 처의 죽음으로 김구 선생님의 형량은 5년으로 줄게 되었다. 김구 선생님은 호를 백범으로 정하시고 이름 또한 나라의 독립을 바라면서 김구라 하였다. 잔기를 2년 남기고 왜놈과 싸운 이유로 김구 선생님은 인천으로 이감 하였다. 인천에서 예전 생각도 하였지만 인천에서의 생활은 서대문에서의 생활에 비하면 굉장히 힘이 들었다. 그래도 김구 선생님은 잔꾀를 부리지 않으시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열심히 일 하셨다.
고된 형량의 기간 동안에도 매사에 열심히 하셨던 김구 선생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또한, 고되고 혹독한 환경에서 나라의 대한 깊은 생각으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절개야 말로 진정한 리더로서의 본보기를 보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백범일지』 6장 망명의 길을 읽고...
서대문 감옥에서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마침내 석방되었다. 김구선생을 기다리던 딸 화경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석방하고 이인배가 위로연을 베풀어 준다하여 기생을 불러 노래 부르고 춤을 추게 하였다. 잔치 도중 어머니께서 부른다고 심부름꾼이 알려주었다. 기생과 어울려 술을 마신다하여 꾸짖으셨다. 감옥살이 동안 막내삼촌이 가족을 보살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김구선생은 교육 및 정치 운동이 왜놈들의 손에 의해 어려워졌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지사들은 대개 해외로 망명하였다. 김구선생은 농촌 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동산평 농장으로 갔다. 그곳은 타락한 소작인들이 도박에만 정신을 쏟으며 생활이 비참하였다. 그곳에 내려가 먼저 도박을 금지시키고 학교의 갈 나이의 아이들은 반드시 학교에 보내도록 하였다. 지키지 않을 때에는 소작 농토를 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동산평에 학교를 세우고 선생을 초빙하였다. 그렇게 농촌 운동을 하는 중 3·1운동이 일어났다. 대대적으로 검거할 것이기 때문에 사리원으로 가서 경의선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신의주에서 목재상이라 속여 검문에 통과하고 안동현에서는 좁쌀을 사러 왔다고 했다. 안동현에서 일주일을 묵고 영국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서 이동녕, 이광수, 김흥서, 서병호 등의 동지를 만났다. 상해에서 독립지사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세웠다. 정부 수반에는 국무총리 이승만 박사, 그 밑으로 내무·외무·재무·법무·교통 등의 부서를 두고 내무 총장에는 도산 안창호를 추대하였다. 그리고 안창호는 김구선생을 경무국장으로 임명하였다.
아내가 아들 인을 데리고 상해로 왔다. 임시정부가 세워진지 2년 후였다. 2년 후에는 어머니도 오셨다. 그해에 아들 신이 태어났다. 임시정부에서 일한지 5년 만에 김구선생은 내무국장이 되었다. 그 후 3년 뒤에 어머니가 손자 인을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가셨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11년에 정부 요인들은 김구선생을 국무령에 추대하였다. 국무령은 임시 정부 최고 책임자이다.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구선생은 60평생을 돌이켜보면 사람 사는 이치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귀하면서도 궁하고 천한 생활 속에서도 궁하였다고 적으신다. 아직까지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자기 것으로 가져 본일이 없다 하였다. 자식들에게 아비 노릇을 못하여 대접을 해주길 바라지 않지만 사회의 은덕으로 먹고 배우고 있으니 사회를 아비로 알고 좋은 일을 하면 더 바랄게 없다고 적으시면서 상권이 마무리되어지고 있었다.
백범일지의 상권까지 읽으면서 조국에 대한 커다란 충성심을 보았고 사람을 이끄는 헌신적이고 때론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진정 우리가 어떠한 일에 있어서 김구선생과 같은 리더십을 갖는다면 커다란 성공을 가지고 오지 않을까 생각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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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2.02
  • 저작시기2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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