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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감리교회 교육사업][감리교회 의료사업][감리교회 한국 선교][교리적 선언]감리교회의 시작, 감리교회의 총칙, 감리교회 교리적 선언, 감리교회 교육사업, 감리교회 의료사업, 감리교회 한국 선교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감리교회의 시작

Ⅲ. 감리교회의 총칙
1. 총칙의 배경
2. 연합 신도회 총칙

Ⅳ. 감리교회의 교리적 선언

Ⅴ. 감리교회의 교육사업
1. 감리교 교육
2. 감리교 신앙교육의 방법론
3. 감리교 교육의 현장

Ⅵ. 감리교회의 의료사업
1. 의료사업과 인재양성
1) 세브란스 병원
2) 정동 제일 병원
3) 동대문 부인 병원
4) 평양 기홀 병원
5) 해주 구세군 병원
6) 원주 서미감 병원
7) 원산 구세 병원
8) 개성 남성병원
2. 여성 사회 사업
1) 원산 보혜 여자관
2) 서울 태화 여자관
3) 개성 고려 여자관
4) 춘천 여자관

Ⅶ.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

참고문헌

본문내용

설립하려고 협의하기 위하여 서울을 왕래 하면서 환자 치료를 시작하였다. 이덕 박사가 모금할 때 - 아이베임(린취벅 교회 평신도)씨가 $5, 000을 내기로 약속하고 1907. 가을에 건축비를 부담한다. 1907. 9. 이위만 박사가 선교사로 파송받아 개성에 \"아이베이 기념병원\"을 창설 하였다.
2. 여성 사회 사업
미(북) 감리교회에서는 1969 보스톤에서 독실한 여신도 8명이 중심이 되어 \"미 감리교회 해외 여선교부\"를 조직 하였다. 남 감리회는 1878. 에 \"남 감리회 해외 여선교부\"를 조직 하였다. 미(북) 감리회 해외 여선교부 - 처음 파송 전도사 = 1885. 6. 20. 스크랜톤 박사의 모친 (메리-스크랜톤여사) 1886. 5. 31. 이화학당을 설립한다. 미(남) 감리회 해외 여선교부 - 처음 파송 선교사 = 오랫동안 중국에서 선교사업하던 캠벧 부인이 1897. 10. 9. 내한하여 1898. 10. 2. 배화학당을 설립했다.
1) 원산 보혜 여자관
1906 노을스 여선교사가 원산 - 상리교회에서 사업을 결심하고, 남촌 예배당 밑에 있는 초가집을 구입하여 \"반렬방(The Class Room)\" 이라 이름 지어 부인들을 모아 성경과 한글을 가르쳤다.
2) 서울 태화 여자관
1920. 9. 20. 미국 남 감리회 선교부에서 이 완용의 소유지를 매입하여 \"태화여자관\" - 초대 관장에 마의시가 취임하여 1921. 4. 5. 개관하였다. 손, 머리, 마음을 단련하는 운동을 하였다.
3) 개성 고려 여자관
1922. 5 개관하였다.
4) 춘천 여자관
춘천은 남 감리회의 선교지역으로 1908. 무스 목사가 처음 주둔하였다. 마의 시 양의 주선으로 2만원 건축기금으로 벽돌 양옥집 건축하여 \"춘천여자관\"을 시작하였다.
Ⅶ.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
1882년 5월 22일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그 비준의 답례사절로 민영익을 수반으로 한 일행이 1883년 6월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왕복여행을 미국 군함을 사용하였으며 아더(Arther) 대통령을 비롯하여 미국 국민들은 정중한 태도로 한국사절단을 환영하였다. 이들은 미국 서부에 상륙하여 기차편으로 워싱톤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었다. 민영액은 도중에 차내에서 발티모아(Balti More)가우쳐 대학교의 총장인 가우쳐 (John F.Gaucher) 목사를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접촉이 한국선교 개시의 기연이 될줄이야 그때에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가우쳐 목사는 사절단원들과 대륙을 횡단하면서 한국인의 씩씩한 모습에 감동을 받았으며 특히 전권대사 민영익과의 담화에서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받았다. 가우쳐 목사는 한국이야말로 새 선교지가 될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는 곧 감리교 선교본부에 한국선교의 개시를 권유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선교사업의 개시를 위하여 2천 달러의 헌금까지 송부하였다. 감리교 선교본부에서는 한국 선교의 시기상조론이 있어 그는 좋은 회답을 받지 못하였다. 가우쳐 목사는 자신의 권유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알게되자 일본에 선교사로 가있는 매클레이(Robert S.Mac-lay)목사에게 한국선교에 관하여 서신을 보내면서 한국에 건너가실지 답사한 후에 선교지로서의 적합성 여부를 조속히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매클레이 목사는 가우쳐 목사의 요청을 받자 곧 1884년 6월 24일 한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몇 해 전에 동경에서 친교를 맺은 한국정부의 고관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 국왕을 만나 뵐 수 있었다. 이때 매클레이 목사는 일본어로 된 서함을 국왕에게 바쳤다. 그리하여 그해 7월 3일 고종께서는 매클레이 목사에게 한국 국내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시행해도 좋다고 하는 윤허를 내리셨다. 매클레이 목사는 미국 공사 푸우르 (Lucius H.Foote)에게 서울에 선교사 주택과 병원, 학교 등의 시설을 위한 기지의 구입 알선을 위탁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매클레이 목사는 가우쳐 목사에게 감력에 넘친 회신을 보냈으며 미국 감리교 선교본부를 향하여도 속한 시일 내에 교육과 의료사업에 종사할 선교사를 선임하여 파송해 달라고 의뢰하였다. 그의 편지는 [교육사업과 의료사업부터 시작하지만 선교를 위한다는 사실을 감추지 아니하여도 무관할 단계에 이르렀다고]고까지 하였고 [교육사업이나 병원 개설이 모두 성과를 올리게 될 것이라고 첨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 정부의 반대가 없을 것이다]라고 선교본부를 향해 단언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미국 북감리교의 유력한 기관지 [그리스도인 회보]) The Christian Advocate)에게 게재되었고 또한 [복음세계] (The Gospel in All Lands)라고 하는 선교회보에도 일본 주재 선교사들의 일치한 열렬한 호소문이라고 하는 내용으로 게재되었다. 호소문의 발표에 따라 드디어 미국교회의 한국선교에 관한 관심은 급격히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도처에서 한국선교를 위한 헌금이 선교부를 향해 답지되었고 1883년에는 5천달러의 거액이 한국 선교를 위한 기금으로 선교부 예산에 편입되었다. 1884년 말 아펜셀라 목사 부부를 비롯하여 스크랜톤 의사 부부와 그의 모친인 스크랜튼 여사 등 5명이 한국을 위한 최초의 선교사로 선택되었다. 이들 일행은 1885년 2월 3일, 아라빅 (S.S.Arabic) 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San Francisco)항을 떠나 일로 은둔국 (Hermit Nation) 한국을 향하여 태평양 횡단 항로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기독교 대한감리회 장정편찬위원회 편 / 교리와 장정, 1995
김경환 / 한국 감리교 사회신경에 관한 연구,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1995
노길명 / 한국 종교성장의 사회적 배경, 한국교회와 사회, 서울: 나단, 1996
민경배 / 한국교회의 사회의식과 그 운동사, 기독교사상, 9, 73-88, 1980
유낙환 / 경건주의 운동과 감리교 운동의 비교 연구,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6
이원규 / 한국 기독교의 사회변동적 기능, 한국사회발전과 기독교의 역할, 서울: 한울, 2000
정경옥 / 기독교의 원리, 서울: 기독교 대한감리회 교육국,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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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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