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이해] 세계 디자인의 경향에 대해 그리고 루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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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디자인의이해] 세계 디자인의 경향에 대해 그리고 루벤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세계 디자인 경향에 대해
- 북유럽의 디자인 경향

2. 좋아하는 디자이너 or 화가에 대해
- 루벤스

본문내용

뜻을 세웠다. 15세 때 A.노르트(1562~1641), O.베니우스(1556~1629) 등에게 그림을 배운 뒤(이 때의 기록은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21세 때인 1598년 당당히 안트워프화가조합에 등록, 23세 때인 1600년에 이탈리아 유학의 꿈을 실현시켰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8년 동안 베네치아로마 등지에서 고대미술과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당시 이탈리아의 바로크화가인 M.카라밧지오와 카라치파(派)의 영향을 받아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차차 명성을 얻는 한편, 만토바공작의 인정을 받아 그의 사절로서 외교적 사명을 띠고 에스파냐(스페인)로 여행하였다. 1608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왔을 때 이미 어머니가 운명한 뒤였으나, 그는 플랑드르 제일의 화가로서 고향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1609년 플랑드르 총독 알브레흐트 대공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10월에는 명문 집안의 딸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하였다. 그 뒤로는 날로 높아가는 명성과 많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루벤스 특유의 화려하고 장대한 예술을 펼쳐나갔다.
역사화종교화를 비롯하여 많은 종류의 제재를 작품화하였는데, 파리의 룩셈부르크 궁전(현재는 루브르 미술관 에 전시)의 21장면들로 이루어진 연작 대벽화 《마리아 데 메디치의 생애》는 그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루벤스 예술의 모든 특질을 담고 있으며 바로크회화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현란한 그의 작품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며 밝게 타오르는 듯한 색채와 웅대한 구도가 어울려 생기가 넘친다. 외교관으로서도 활약하였으며 원만하고 따뜻한 인품으로 말미암아 유럽 각국 왕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626년 아내 이사벨라가 죽은 후, 1630년 16세의 헬레나 푸르망과 재혼하였다. 1640년 팔의 통풍이 심장에까지 번져 5월 27일 유서를 쓰고 30일 안트워프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6월 2일에 거행되었다.
마리아 데 메디치의 생애 중 대관식과
느낀 점
루벤스에 관한 책들과 자료, 그림들을 보면서 모르는 것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정확한 의미도 모른채 이름만 알고 있는 ‘바로크 양식’과 플랑드르 화풍, 루벤스작품들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들이 그것이었다.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이라는 책에서는 루벤스의 화풍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루벤스의 화풍은 강렬한 빛의 조화는 카라밧지오의 영향을 받았으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현에서는 카리치의 영향이 느껴지고, 마치 연극무대를 보는 듯한 과장되고 다소 현란한 인물들의 역동적인 모습, 한결같이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여인들이나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부채질하는 우윳빛 피부, 게다가 관능적인 속살거림이 들릴듯한 야릇한 분위기는 루벤스의 트레이드마크이자 플랑드르 바로크양식의 전형으로 자리잡았다.“ 루벤스의 작품들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들을 찾다가 재밌는 책을 발견했는데, 바로 조선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 라는 책이었다. 이 루벤스가 한국남자를 그렸다고하는 논쟁을 둘러싼 책이다. 책은 루벤스가 그린 그 그림의 주인공이 조선남자임을 증명한 책인데, 책을 읽고나면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루벤스作 [조선남자]
<용어정리>
포스트모더니즘 - 모더니즘은 혁신이었으나 역설적으로 보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재현에 대한 회의로 개성 대신에 신화와 전통 등 보편성을 중시했고 피카소, 프루스트, 포크너, 조이스 등 거장을 낳았으나 난해하고 추상적인 기법으로 대중과 유리되었다. 개인의 음성을 되찾고 대중과 친근하면서 모더니즘의 거장을 거부하는 다양성의 실험이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따라서 철학에서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상황이 반발의 측면이 강하지만 예술에서는 연속의 측면도 함께 지닌다. 비록 이성과 보편성에 의지했지만 이미 재현에 대한 회의가 모더니즘(현대성)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두산 백과사전-
바로크양식 - 바로크라는 용어는 포르투갈어의 barroco에서 온 듯하다. ‘비뚤어진 모양을 한 기묘한 진주(眞珠)’라는 뜻인데, 이 말은 본래 16세기 유럽을 지배한 고전주의 르네상스 뒤에 나타난 양식에 대하여 모멸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의 독일 미술사가들에 의해 바로크라는 용어에서 ‘변칙 ·이상 ·기묘함’이라는 부정적 평가는 제거되었다. 바로크는 미술사 ·예술학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현재는 이 개념이 다른 예술양식에도 적용되고 있으며 한 시대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미술사가 H. 뵐플린은 19세기의 평가에 나타나는 이 양식을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퇴폐현상이라고 보는 견해를 부정했다. 그의 연구는 바로크 미술을 르네상스의 타락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며 르네상스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양식이어서 양자는 근대미술에서의 2대 정점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두산 백과사전-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 - 본명 Michelangelo Merisi. 베르가모 근교의 카라바조 출생. 초기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1584년 밀라노의 화가 시모네 페테르차노에게 사사하고 그 후 로마로 가서 처음에는 빈곤과 병고로 비참한 생활을 하였으나, 뒤에 추기경 델 몬테의 후원으로 화가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정물과 초상을 치밀한 사실기법으로 묘사하여 바로크미술양식을 확립하였는데, 우피치미술관의 《바쿠스》, 루브르미술관의 《여자 점쟁이》 《성모의 죽음》, 로마에 있는 산루이지 데이 프란체시성당의 《성마태오의 순교》, 바티칸궁전에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 《로사리오의 성모》 《나자로의 부활》 등 성모와 성자를 모델로 로마에 사는 빈민의 모습을 등장시킨 그림들을 보면 그는 빛과 그림자의 날카로운 대비를 기교적으로 구사하고, 형상을 힘차게 조소적(彫塑的)으로 묘사함으로써, 근대사실(近代寫實)의 길을 개척하였다. -두산 백과사전-
카라치(Lodovico Carracci 1555~1619) - 이탈리아의 화가. 반종교개혁파의 마니에리스트로 출발하여 깊은 공간과 극적인 광선을 사용하여 표현력 있는 종교화를 그렸다. 사촌동생 A.카라치와 함께 미술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바로크회화의 확립에 공헌했다.-두산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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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2.13
  • 저작시기2008.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0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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