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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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술(酒)의 등장

2. 조선시대의 술

3. 조선초기의 금주령

4. 생활사에서의 술

5. 영조의 금주령
*참고문헌

본문내용

40) 9월 11일 정언 박상로가 10개 항목에 걸쳐 금주령의 폐단을 조리 있게 논박했으나 영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박상로만 사적(士籍)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무거운 처벌을 받았을 뿐이다. <<영조실록>>40년 9월 11일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정조실록>>6년 5월 26일 조에 금주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좌의정 홍낙성은 “곡식이 허비되는 것이 술에 있으니, 술을 많이 빚는 것을 금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정조는 곡식을 줄이는 효험도 보지 못하고 백성들만 소요시키게 된다는 이유로 금주령 발동을 거부한다. 정조는 영조 시절의 가혹한 금주령이 백성들을 괴롭히기만 하고 실제로는 별 효과가 없었음을 간파한 것이다. 정조의 관대한 정책으로 술의 소비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p136-141
정조 이후로 수시로 금주령이 발동되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순조실록>>32년 윤9월 17일조에 주금을 어겼을 경우 형조에서 처벌하는 상세한 규칙을 만들었다는 기사가 실려있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영조 사후 그 어떤 강제도 음주의 욕망을 억압하지 못했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p143-144
서양인들이 식사에 곁들여 자주 먹는 포도주의 적당한 음주는 사람의 원활한 혈기를 유지해주고, 적당한 기분의 고조로 흥취의 기분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생선에는 백포도주, 고기류에는 적포도주에 기분에 따라서 먹고, 또 식사 후 디저트로 다른 향의 포도주를 즐기기도 한다. 아마도 조선시대 사람들의 반주(飯酒) 또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적당한 음주가무를 아는 삶이란 삶에서의 일탈을 꿈꾸던 이들의 작은 시도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술에 대해 조사해본 처음 의도는 영조의 금주령 이후 술의 변천과정에 대해 알아보려했지만, 생활사에 관한 책과 다른 자료(고금소총, 청구야담, 계서야담)를 찾아보았을 때 술에 대한 이야기는 있었지만 자세한 종류나 특색적인 내용이 없었다. 구황작물인 고구마가 들어오고 그것을 이용한 새로운 술의 개발되는 시기까지도, 특별히 많은 술의 발명이나 사례를
<참고문헌>
2004.『빛깔있는 책들, 전통주』. 글,사진 박록담. 대원사
2002.『민속학술자료총서 먹거리 민속주5』 도서출판 우리마당 터
2004.『한국인의 생활사』한미라, 전경수. 일진사
2003.『우리 땅에서 익은 우리술』조정형. 서해문집
2006.『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풍경』김백일. 한국고문서협회
2004.『우리술빚기』조호철. 넥서스Books
2004.『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푸른역사
<참고사이트>
유교넷. 유교문화관. 안동문화 1집
한국고전번역원 - www.itkc.or.kr
조호철의 酒이야기 - www.proof.pe.kr
전통주 만들기 - cafe.daum.net/hombrewing
한국역사통합정보시스템 - http://www.koreanhistory.or.kr/
*목차
1. 술(酒)의 등장
2. 조선시대의 술
3. 조선초기의 금주령
4. 생활사에서의 술
5. 영조의 금주령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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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1.02
  • 저작시기2008.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12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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