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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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임시정부의 수립 배경

Ⅲ.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 활동

Ⅴ. 국민대표회의

Ⅵ. 독립 운동의 통합

Ⅶ.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

Ⅷ. 임시정부의 반성

Ⅸ. 맺음말

본문내용

1919년 이래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생명은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좌우합작위원회의 7원칙을 수요하면서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에 찬동함으로써 중경 임시정부의 존재를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이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문건이 있다면 그것은 편의상의 문건으로 이해된다.
Ⅷ. 임시정부의 반성
임시정부가 아무리 큰 업적을 쌓았다고 해도 반성이 따르기 마련이다. 해방 후 미소 열강에 의한 국제제패로 말미암아 임시정부의 뜻을 펴지 못하였고 또 독립운동의 듯과 같이 독립하지 못하였으므로 반성할 사항이 많을 수 있다. 더구나 남북이 분단되어 미소의 조종대로 분단정부가 수립되어 아직까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서 여러 가지 반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만 간추려 보기로 한다.
① 임시정부의 이념이 분명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한 것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은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건국강령에서 토지를 국유화한다는 규정은 임시정부에서 좌파에 속했던 민족혁명당의 신영삼도 반대하던 조항이었다. 그 조항에 대하여 논란이 일 때, 조소앙은 자본주의는 생명이 다한 것으로 설명했다. 그렇다면 어느 길을 가는 것이냐의 문제가 제기된다. 어느 길이 좋고 나쁨을 가리자는 말이 아니라 어느 길인가를 분명히 할 필요는 있었다.
② 임시정부는 새로운 인력 공급이 극히 적었다. 1945년 해방 당시의 임정 요인이 거의 1919년 임정 수립 당시의 인물이었다. 그 인물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물의 공급이 없었다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10년 전의 앙금이 그대로 살아 있고 1920년대의 기호파 서북파의 대립이 끝내 남아 있듯이, 몇 십년 전의 인간관계와 정서를 탈피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인력공급이 없었다는 것은 새로운 활기를 찾기가 힘들었다는 점에서 민족적 반성이 필요하다.
③ 임시정부의 재정이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재정문제로 불미한 화제를 남긴 것을 반성해야 한다. 임시정부가 김구김원봉 양인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었던 것은 중국정부가 그 양인에게 각각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일 정도로 자금문제가 심각했다. 그럴수록 자금 관리는 투명해야 한다. 그런데 1932년 항주사태가 말하듯이 불미한 화제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④ 국민대표회는 늦어도 1921년에 개최되어야 했다. 임시정부가 준비정부로 수립되었는데 내외의 역사조건이 변하여 준비체제를 갖출 수 없다면 곧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체제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그 시기가 언제였던가? 1921년 안창호김규식이동휘 등이 임시정부를 떠날 때였다고 생각된다. 그때에 열지 못하고 1923년에 개최했더라도 어떻게라도 성사시켜야 했다. 5개월의 회의를 무위로 끝내야 했던 것은 독립운동 전반에서 반성해야 한다. 국민대표회가 순조롭지 못하자 당시 임시정부의 내무장이던 김구가 해산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국민대표회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국민대표회가 뜻과 달리 소란하게 되니까 최한 조치였던 것이다.
⑤ 임시정부는 국민적 기반 위에서 존재가치가 있으므로 국민적 기반의 유지가 가장 중요한데 그에 대한 점검이 소홀했다. 1920년에 노령의 4월 참변에 이어 만주에서 청산리 전투가 있고, 간도참변이 참혹하게 전개될 때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군무부의 만주 이전설 임시정부 군무부는 1920년 4월에 만주로 이전하기로 의정원에서 결의한 바가 있었다. 그것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독립신문》1920년 4월 3일자)
이 나올 정도로 임시정부에 대한 독립전쟁을 촉구한 국민적 분위기였다. 그 국민적 요구를 임시정부는 수용하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여 국민적 기반을 상실하고 침체에 바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20년에는 국내의 임시정부 조식이었던 연통부도 붕괴되고 있었다. 그에 대하여도 적극적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여 국민적 기반을 상실하고 있었다. 1932년 윤봉길의 의거로 국민적 관심을 회복할 대가지 침체기를 맞아야 했는데 그것을 반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Ⅸ. 맺음말
한국독립운동을 일으킨 원동력은 한국 역사와 더불어 축척된 주체의식에 있었고 그러한 주체의식은 독립운동과 더불어 끊임없이 발전했다. 31운동의 정신과 이념을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은 한국인의 민족적 역량을 보여준 독립운동의 커다란 성과이자 소산이다. 비록 어려운 여건과 상황으로 인해, 또는 불완전한 능력으로 인해 갈등과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여러 가지 부족한 면을 미루더라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할과 기여는 소중하다. 정상적인 상황에서의 정부에 대한 평가도 어려움이 많은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고찰은 여타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한 가지 시선이 아닌 여러 가지 시선으로 보아야 함을 느끼게 한다. 무엇으로 고정시켜 규정하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사가 매우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승만, 김구, 이동녕, 박은식 등 임정을 이끌어간 수많은 인사들의 생애와 인간적인 측면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야기할 때 더불어 살펴 보아야함에도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다. 중국의 변방에서 쓰러져 가는 임정의 간판을 끈질기게 부여잡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꺾지 않은 선조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접하면서 엷어져만 가는 나라사랑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좋은 계기였다.
<참고문헌>
『교과서 보다 쉬운 독학 국사 2』, 일빛, 1999.
『한국사 48 -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국사편찬위원회, 2001.
국가보훈처,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80주년 기념 논집 상.하』 1999
이현희, 『임시정부의 숨은 뒷 이야기』, 학연문화사, 2000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연구』, 혜안, 2001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독립운동총서3 - 정치외교 투쟁』, 민문고, 1995.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독립운동사강의』, 한울 아카데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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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2.28
  • 저작시기20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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