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체관측][별][천체망원경][천체관측의 준비][천체관측과 천체망원경][별의 관측][달의 관측][천체관측과 첨성대]천체관측의 준비, 천체관측과 천체망원경, 별의 관측, 달의 관측, 천체관측과 첨성대에 관한 분석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천체관측][별][천체망원경][천체관측의 준비][천체관측과 천체망원경][별의 관측][달의 관측][천체관측과 첨성대]천체관측의 준비, 천체관측과 천체망원경, 별의 관측, 달의 관측, 천체관측과 첨성대에 관한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천체관측의 준비
1. 관측 장소
2. 관측 준비물
1) 관측장비
2) 성도
3) 역서
4) 관측기록지
5) 관측일지
6) 필기구
7) 시계
8) 소형 녹음기
9) 복장
3. 성도 익히기
1) 성도
2) 적도좌표계
3) 적경선과 적위선
4) 범례표
5) 좌표 읽기

Ⅲ. 천체관측과 천체망원경
1. 천체망원경의 원리
1) 준비물
2) 실험과정
2. 천체망원경의 종류
1) 굴절 망원경
2) 반사 망원경

Ⅳ. 별의 관측
1. 별자리 관찰방법
2. 두별 사이의 거리측정
3. 별의 밝기와 등급

Ⅴ. 달의 관측
1. 초승달
2. 상현달
3. 보름달
4. 하현달
5. 그믐달
6. 삭

Ⅵ. 천체관측과 첨성대
1. 첨성대란
2. 구조
3. 유래와 영향
4. 수미산설
5. 어떻게 별을 보았을까
6.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

참고문헌

본문내용

래와 영향
경주 첨성대는 직접적으로 백제 천문대의 영향을 받아서 그와 비슷하게 축조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축조 연대에는 선덕여왕대이며 그 때에는 많은 백제의 건축기술자들이 초빙되어 황룡사 9층탑 등이 건립된 시기이며, 그로부터 얼마후인 675년에는 백제 천문학자들의 영향과 직접 지도하에 일본에도 점성대가 설립되었다는 사실 에서 볼 때에 백제에는 이미 같은 음으로 불리는 천문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 천문대도 주비의 법에 의하여 세워진 측경대일 것이며, 그것이 신라 에 영향하여 첨성대가 되었고 일본에 건너가서 점성대가 되었으며, 백제와 신라의 천문대는 당에 자극을 주어 723년에는 주공측경대의 재건을 보게 하였다고 생각된다.
4. 수미산설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는 천문대라는 의견 이외에도 다른 많은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수미산설이다. 수미산이란 불교에서 나오는 상상의 산이다. 세상은 아홉 산과 여덟 바다가 겹쳐져 있는데 가장 높은 산이 바로 수미산이다. 수미산설에서는 첨성대가 바로 이 수미산을 본떠서 만든 제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불경에 그려저 있는 수미산은 첨성대와 매우 비슷하다.
5. 어떻게 별을 보았을까
사실 위 문제는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일치된 의견을 보고 있지 못하다. 미해결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첨성대가 말 그대로 별을 관측하는 곳이었다고 가정하고 천문대로서의 첨성대의 기능과 관측법을 생각해 보면 어떠할까? 다음은 첨성대에서 관측을 어떻게 하였을까 추측해보면, 둥그런 항아리 형태의 첨성대는 모두 365여개의 화강암을 반둣하게 잘라내 쌓아올린 구조물이다.
먼저 건축물의 기초가 되는 기단부와 둥그런 몸통의 원주(圓柱)부 그리고 우물정(井)자 모양의 두부(頭部)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4각형의 상하 2단으로 되어 있고 높이는 79.9cm, 사용된 돌은 20개이다. 원주부는 총 27단으로 높이는 8.05m이다. 12단까지는 흙이 차 있고 12단은 평평한 판석이 깔려 있다. 그리고 13단에서 27단까지는 내부가 비어 있고 19·20단과 25·26단의 2곳에는 길다란 석재로 정(井)자 모양으로 걸쳐놓았으며 그 양쪽 끝이 밖으로 나와 있다. 13단에서 15단에는 한변이 대략 1m가 약간 못미치는 넓이의 입구가 뚫려있다. 이 사각형 입구의 아래쪽에 사다리를 걸쳐놓았을 듯한 홈이 패어져 있는데 이 때문에 아마도 첨성대의 외부에서 사다리를 놓고 이 입구까지 기어 올라와 첨성대 안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마지막 27단의 동쪽 반원에는 평판석이 있고 서쪽의 반쪽은 열려 있어 그곳을 통해 첨성대의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두부에 올라가 보면 상하 2단으로 각각의 단은 길다란 석재 4개가 서로 맞물려 역시 정(井)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정자 모양의 맞물린 부분에 길다란 목재를 깔아 마루판처럼 사용한 것 같다. 이 위에 올라서서 각종 천문 기구를 통해 하늘을 관측하고 또 그 사실을 기록해 둔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사각형 입구까지 사다리를 외부에서 걸쳐놓고 안으로 진입한 후 다시 내부에 작은 사다리를 이용하여 정상부까지 오른 후 목재를 마루처럼 깔아 그위에서 각종 천문 현상을 관측하였던 것이다. 혹자는 첨성대의 꼭대기에 돔형의 지붕을 덮어 관측기구를 보호하였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상설로 관측기계를 두기보다는 그때 그때 관측에 필요한 도구를 가지고 올라가 사용하였다고도 말하지만 현재로서는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첨성대가 실제로 천문관측대의 역할을 했다면 이러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뿐이다.
6.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
지금까지 첨성대의 기능적인 면을 살펴보고 대표적인 이설의 모순을 지적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첨성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의문의 중심은 오늘날의 천문대가 산중에 있음에 반해, 첨성대는 신라의 왕도인 경주의 시내, 즉 평지에 있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닐런지...
오늘날 천문대가 산중에 있는 것은 도시 가까이에서는 야간에 불이 너무 밝고 또 오염이 심하여 공기중에 먼지가 많아 별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시대 경주는 공해가 없었기에 평지라도 별을 보는 데 아무런 불편도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천괴(天怪)가 있으면 바로 국왕에게 보고해야 했기에 평지에 있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평지에서 9m 안팎의 첨성대 높이는 별을 관찰하기에 가장 적당한 높이라고 한다. 이는 9m 미만의 나무는 바로 옆에 있어도 시계에 방해를 주지 않으며, 50m 나 그 이상 떨어진 거리라면 높은 나무가 있어도 앙각(仰角)에는 6도 이상의 방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첨성대의 높이가 현재의 절반 높이였다면 첨성대는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의 의문은 여전히 첨성대의 구조에 관한 것들이다. 이 의문에 따르면 원통 부분은 사각문을 중심으로 하단이 12단, 상단이 12단으로 되어 있어 이는 1년 12개월과 24절기를 뜻하고, 원통 부분이 27단과 기단 1단(원래 2단), 그리고 상층부 1단을 합한 29단이 음력 한 달의 날수인 29일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여기에다 원통 부분의 벽돌형 석재 수가 3백 60여개 여서 이는 1년의 날수를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 해석도 엄밀하게 구조물을 분석해 보면 지나친 자의적 해석이란 비판이 따르고 있다. 약 16도 동남향하고 있는 첨성대의 방위에 대한 것도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지 않은, 건조 당시의 신라인들이 특정 방위에 맞추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한다.
참고문헌
김희수 / 관측천문학 실험, 북스힐
김종철(2001) / 별차리 찾아서
이규석 외 5명(2003) / 고등학교 지구과학 Ⅰ, Ⅱ 전시본, 대한교과서(주)
존 파먼, 이충호·채돈묵 역 / 놀랄 만큼 간단한 과학의 역사, 사계절
제전박 / 별에 가까이 간 사람들, 인물로 보는 천문학의 역사 1·2, 가람기획
전상운(2000) / 한국과학사, 사이언스북스
한국 천문학사 편찬위원회(1999) / 국 천문학사 연구, 녹두

키워드

  • 가격5,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9.05.07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3404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