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 이승만을 비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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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일성과 이승만을 비교하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 1

Ⅱ. 출생 ------------------------------------------------- 1
1. 김일성 ------------------------------------------------- 1
2. 이승만 ------------------------------------------------- 2

Ⅲ. 독립운동 -------------------------------------------- 3
1.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 3
2. 이승만의 외교독립운동. ------------------------- 4

Ⅳ. 리더십 ----------------------------------------------- 4
1. 이승만의 리더십 ------------------------------------------ 5
2. 김일성의 리더십 ------------------------------------------ 7

Ⅴ. 결론 ------------------------------------------------- 9

<참고문헌> ----------------------------------------------- 10

본문내용

. 김일성의 국내파에 대한공격은 46년 8월 북로당 창설 이후 계속되어 왔는데, 2차 전당대회를 계기로 국내파에 대한 일차적 숙청은 마무리된 것으로 보였다. 당시 국내파를 제거하기 위해 김일성이 내세웠던 가장 큰 명분은 친일 부역자 제거였는데, 이 명분에서 일제치하에서 국내에 잔류해 있던 국내파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1948년 9월 9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로 북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이 공식화되었다. 일종의 입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에는 연안파의 김두봉이 의장으로 취임하였고, 행정부에서는 김일성이 수상, 남로당의 박헌영, 홍명희, 빨치산파의 김책이 부수상으로 임명되었다. 각료 16명 중 남북한 출신이 반반이었으며, 각 파벌의 분포로 볼 때 국내파가 7명의 남한 출신을 포함하여 10명, 연안파 2명, 갑산파 4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볼 때, 김일성 권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외양으로는 여전히 정치적 연립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정부 수립에 따라 소련군이 철주하였으나 한인 2세들과 소련 고문관들은 잔류하였다.
1949년 6월에는 ‘조선노동당’의 창당으로 당 조직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조선노동당은 북조선노동당과 이남에서의 패배 후 북행한 남조선노동당의 합당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로써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 후 추진했던 연립에 입각한 대중정당의 건설이 완료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조선노동당에서는 김일성이 위원장으로, 박헌영과 소련파의 허가이가 부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김일성에 대한 당 내의 도전은 심각했다. 왜냐하면 분단의 고착으로 대거 입북한 남로당원이 수적으로 다수였던 데다 소련군이 철수하여 막강한 후원세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빨치산 파들은 소수였고, 그나마 군과 보안기구에 집중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정부와 당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소련군은 비록 철수하였으나 이그나체프는 고문단의 이름으로 잔류하였고 연안파는 대결을 회피했으며, 소련파는 김일성의 권력 장악에 순응했다. 당시 북한은 소련군 철수에도 여전히 소련의 영향 하에 있었고, 김일성은 이 위성을 운영할 선택된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이행하였다.
2) 한국정쟁 후 권력장악
한국전쟁은 남한 국내정치의 사태발전 방향을 변화시켰지만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배체제를 파괴시켰다.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남한에서는 전쟁 이전에 벌어졌던 분열의 악순환을 해소시키고 체제를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면, 북한에서는 정치적 파벌의 재편성으로 이어진 내부적 불화를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의 한반도 개입은 북한을 소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었다.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김일성은 유격대원다운 유연성과 리더로서 결단력 있는 특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소련당국에 잘 봉사했고, 만주항일무장투쟁에서 얻은 경험과 명성을 자신의 이미지에 잘 부합시켜 북한에서 최고 권력을 얻는데 성공했다. 1950년 6월 김일성은 ‘분단된 조국의 해방’을 목표로 소련의 원조를 힘입어 기습남침을 시도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전쟁은 북한지도부 및 소련과 중국의 기대와는 달리 북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로 귀결되지 못했다. 오히려 중공군(인민의용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북한은 겨우 괴멸을 면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한국전쟁은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의 지도부에게는 커다란 재양이라고 할 만 했다. 당초 김일성이 주장했던 ‘조국해방’을 이루는데 실패함은 물론 북한 전역을 파멸로 몰고 갔다. 전쟁의 실패는 군사적 영역에서 두드러진 장악력을 보인 빨치산계의 힘의 약화를 의미하기도 했고 김일성의 정치적 판단에 대한 회의를 가능하게 하는 명백한 증거였다. 따라서 김일성을 비롯한 빨치산계의 헤게모니가 가장 세찬 도전을 받았고 어쩌면 오늘날 존재하고 있는 북한의 정권과 다른 형태의 정권이 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많았던 시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위기 속에서 김일성은 전후 불어 닥칠 ‘전쟁책임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그가 택한 것은 반대파에게 전쟁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었다.
Ⅵ. 결론
지금까지 한반도의 초대 지도자였던 김일성과 이승만에 대해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나이부터 독립운동 방법, 사상 등 닮은 것이 없지만 권력욕만큼은 엄청 났다. 김일성의 경우 북한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는 48년부터 사망하는 94년 까지 50여년에 육박하는 일인독재체제를 유지했고 나아가 아들인 김정일에게 통치자의 자리를 세습했을 정도로 끊임없는 권력욕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이승만 역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당시 의원내각제를 표방한 임시정부는 대통령이란 직위가 없음에도 대통령이란 자리를 고집했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후에도 헌법 개헌과 부정선거를 통해 장기집권하려는 꿈을 키웠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두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성공한 리더라고 보기엔 어렵다. 냉전시대 속에서 북한을 이끌었던 김일성은 아들에게 정권을 세습하는 마치 봉건시대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국부’라는 자아도취에 빠졌던 이승만은 국민에 의해 쓸쓸히 권력에서 물러나야했다.
결국 일제강점이라는 조국의 고통 속에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두 사람의 공적은 존경받아 마땅하지만 권력의 중심에서 브레이크를 잡지 못한 채 독재의 길을 걸어간 점은 아쉬울 뿐이다.
또한 해방 후의 혼란기 속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통일 정부의 유일한 길이었던 남북협상을 방해했던 김일성과 이승만이 남과 북의 초대 지도자로서 집권하게 된 것은 지금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된 원인이 아닐까. 물론 역사의 전개 과정을 단순히 인물로 치환할 수 없겠지만,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는 역시 리더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서대숙. (2000). 현대 북한의 지도자 - 김일성과 김정일. 서울 : 을유문화사
남경태. (2007). 종횡무진 한국사 (하). 서울 : 도서출판 그린비
조창용. (2005). 김일성과 항일무장투쟁. 중부일보 <조창용칼럼>
서중석. (2005).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서울 :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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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6.02
  • 저작시기20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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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38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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