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춤 및 생애 (사진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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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춤 및 생애 (사진有)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예술은 사기’라고 폭탄선언을 했고, 이는 ‘무엇을 근거로 예술이 사기인가’라는 논란을 불러오며 문화예술계에 한 차례 파문을 일으켰다.
이어 86아시안 게임 때 인공위성 프로젝트인 ‘바이바이 키플링’을 만들어냈던 그는 88년 서울올림픽 때도 인공위성쇼인 ‘세계는 하나’를 엮어내 각별한 조국애와 타고난 천재성을 과시했다.
세계적 명성을 구가한 그는 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대상의 영예를 차지함과 동시에 독일의 저명한 ’카피탈’지가 선정한 현존최고 미술가 100명 중 다섯번째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96년 호암예술상을 받고 올해 미국 마이애미 예술가상, 일본 교토프라이즈를 수상한 것도 그의 위치를 잘 말해준다.
백씨는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내 인생 중 가장 인상깊은 일은 예술가 친구와의 만남이며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그 산물이다”고 지적하면서 무명일 때 만나 동지적 유대관계를 맺었던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스를 꼽았다. 그러면서 외국에서 평가받은 후에야 알아주는 국내풍토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서울=연합뉴스
백남준 그는 누구인가
지난 29일 세상을 떠난 비디오·퍼포먼스 예술가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금세기 최고의 실험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예술학교에서 작곡·음악미학·미술사 등을 공부했고 뮌헨대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했다.
작가로서 데뷔하는 시기에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주로 작곡과 퍼포먼스 등 네오다다이즘적 성격의 미술 운동을 벌였다. 또 요제프 보이스와 함께 전위미술운동 그룹인 프럭서스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콜라주 기법이 유화물감을 대신했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라고 공언했던 그는 비디오의 폭넓은 표현가능성을 발견, 순수 전자음악 작곡가에서 시각미술가로 다시 태어났다. 1965년 뉴욕에서 '자니 카슨 쇼'를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전기철사를 이용해 지워가는 비디오 테이프 설치작업을 보였다.
그는 시청자를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시키는 기술을 해체, 재구성해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과 의지로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방법을 탐구했다. 특히 클래식 첼로 연주자인 샬롯 무어맨을 위해 제작한 몇 편의 비디오 퍼포먼스는 그 도발적인 행위 때문에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67년 뉴욕에서 선보인 ‘오페라 섹스트로닉’을 공연할 때 이 첼로 연주자는 완전히 나체로 등장했다. 백남준은 이 작품으로 인해 '대중의 품위를 공공연하게 모욕한 예술'이라는 죄목으로 즉각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예술적 검열의 한계를 바꿔, 미국 정부는 결국 해당 법조항을 개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작품은 공연장면의 사진과 체포되는 장면의 사진, 그리고 1만 개의 단어로 씌어진 판사의 판결문으로 남아 있다.
1967년 해프닝 예술가인 앨런 카프로의 초청으로 뉴욕주립대학의 객원작가를 지냈고, 1976년 베를린 예술원 주최로 ‘달은 가장 낡은 것이다’라는 작품을 발표했으며, 1977년에는 최초로 위성방송 프로그램인 ‘도큐멘타 6’을 선보였다. 위성 텔레비전을 이용한 우주 동시 중계 쇼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6년 ‘바이바이 키플링’으로 이어졌다.
그는 1980년대에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다.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있었던 백남준 회고전,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를 기념하는 대형 비디오 설치작품 ‘다다익선’ 등이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이다.
1992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비디오 때 비디오 땅전’을 열었고,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2000년 10월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헐렁한 흰색 와이셔츠와 까만 멜빵, 그리고 왼쪽 멜빵 앞가슴 부분에 시계를 단 모습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조선닷컴
그는 시대를 앞서간 삼류 예술가
자신을 항상 삼류예술가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시대를 앞서 살았던 백남준.
미술의 새로운 형태를 창시한 그가 작품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들이 워낙 독특했던지라 일부 사람들은 '편집증 심한 살짝 정신이 이상한 할아버지'라는 인식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진 속에서 보이는 젊은 시절의 백남준은 마치 이웃집 형마냥 평범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의 외모를 지녔으며 세련되지 못하고 어딘가 촌스러워보이지만 착하고 순박한 한 청년이었다.
백남준은 '태창방직'을 운영하는 사업가였던 부친으로 인해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60년대에 유학을 갔을 정도면 쉽게 이해가리라 본다.) 하지만 부친의 사망과 5·16 등 혼란스러운 정세로 인해 독일에 유학간 뒤 송금은 끊겼다. 마지막 송금된 돈으로 산 것이 TV 12대이다.
다들 요즘 모 이동통신사의 '쇼를 하라~'하고 나오는 광고에 익숙할 것이다. 그 광고처럼 '쇼하고 있네~'하는 비웃음, 당시 백남준이 가장 많이 들었을 말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계속 쇼를 했고 결국 TV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는 비디오아트의 창시자가 됐다.

▲ 만프레드 레베, <음악전시회-전자텔레비전>,1963, 흑백사진, 24×30
ⓒ200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백남준과 관련해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바로 작년 그의 장례식. 조문객들은 가위로 서로의 넥타이를 잘라 고인의 시신 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그의 작품 '다다익선' 앞에서 49재와 같은 기념식을 했는데 그 때 진행자가 구경하는 사람들의 넥타이를 뺏어 자른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당황하고 난감해 했으며, 이는 비디오로 고스란히 담겨 미술관에서 상영중이다.
"넥타이는 맬 뿐만 아니라 자를 수도 있으며, 피아노는 연주뿐만 아니라 두들겨 부술 수도 있다."
백남준이 한 말이다.
그의 작품도 파격적이지만 인간 자체도 파격적이었던 백남준. 그가 사후에도 세상에 쇼를 펼쳐보일 수 있을지, 얼마나 더 유명해질지는 세월을 두고 더 지켜볼 일이다.
시대에 맞춰 끊임없이 진화하고 죽어서도 대중들과 같이 소통하며 즐거움을 주는 그는 언제까지나 대한민국을 너머 세계 예술의 상석에 남아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메시지를 던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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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7.09
  • 저작시기2009.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44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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