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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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포에니 전쟁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포에니 전쟁의 뜻

2. 포에니 전쟁의 원인

3. 포에니 전쟁의 의의

4. 1차 포에니 전쟁
1) 전쟁과정
2) 전쟁이후

5. 2차 포에니 전쟁
1) 전쟁과정
2) 전쟁이후

★ 명장 한니발 장군
★ 명장 스키피오 장군

6. 3차 포에니 전쟁
1) 전쟁과정
2) 전쟁이후

본문내용

한니발은 병력의 선두에 80마리의 코끼리를 배치했고 보병을 3개 대열로 세웠다.
제 1선은 리구리아인과 골족의 중장보병으로 구성하고, 무어인 경장보병과 발레아레스인 돌팔매병을 사이사이에 배치했다.
제 2선에는 새로 모병한 카르타고인과 아프리카인 등 그가 거의 믿지 못하는 군대를 배치했다.
제 3선은 그의 직속 군대인 이탈리아 출신의 베테랑 보병으로 구성되었고, 제 2선의 약 180미터 뒤에 배치되었다.
우익에 1,000명의 카르타고인 기병을 배치했고, 좌익에는 1,000명의 누미디아인 기병을 배치했다.
스피키오는 적 코끼리에 대응하고 자신의 우세한 기병을 활용하기 위해 통상의 군단 배치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3개 대열의 마니풀루스를 장기판 식으로 엇갈리게 정렬하는 대신 종대로 배치해 코끼리가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었다.
코끼리가 사이로 지나가면 통로에 있던 벨리테스로 하여금 코끼리를 처리하게 했던 것이다. 구는 마시니사의 누미디아인 주력을 기병의 우익에 배치하고, 이탈리아인 기병을 좌익에 배치했다.
전투는 양측의 누미디아인 기병들끼리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코끼리를 출동시켰으나 대부분 로마군 대열 사이를 통과해 버렸다. 로마군의 기병은 혼란한 틈을 타 카르타고의 양 측면의 기병을 패주시켰다.
로마 기병은 카르타고 기병을 멀리까지 추격하였고, 보병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오랫동안 버텼지만 로마군의 기병이 돌아와 카르타고 군을 포위하였고, 카르타고 군은 전멸하였다.
2차 포에니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전투이니 만큼 군사학적으로도 대단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항복을 하였고 2차 포에니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6. 제 3차 포에니 전쟁 (BC.149 ∼ BC.146)
(1) 제 3차 포에니 전쟁과정
2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 카르타고는 로마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 의해 영토를 카르타고 주변으로 제한받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것은 로마에 의해 군비가 제한받게 된 것이었는데, 카르타고는 전투함 건조를 규제받았을 뿐만 아니라, 병력을 이동할 때는 사소한 것이라도 로마에 보고한 뒤에 할 수 있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의 부족한 기병전력을 보태어 주며 로마편에 서서 싸운 덕분에 카르타고의 서쪽, 누미니아의 왕이 된 마시니사는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카르타고를 빈번하게 침공하였으며, 카르타고는 이 때마다 로마에 보고하고 군대를 이동시켜 누미디아군을 격퇴하려고 하였으나 로마의 병력이동 허락을 받지 못하여 매번 영토를 유린당해야만 했다.
이에, 계속되는 로마의 편파적인 판정에 격분한 반로마파가 주동이 되어 군대를 출병, 누미디아 군을 격파하였으며 로마는 이를 휴전조약에 대한 명백한 위반으로 간주하고 대 스키피오의 손자인 소 스키피오를 사령관으로 하는 군대를 출동시켜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소 스키피오(대 스키피오 손자)가 이끄는 로마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자, 카르타고 내부에서는 주전파와 주화파 간의 갈등으로 혼란이 벌어졌으며, 결국 로마와의 평화협상을 추진하기 위해 카르타고 내의 주전파가 모두 처형되고, 스키피오군의 진영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애초에 로마의 목적은 카르타고의 완전한 소멸이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에게 화평의 조건으로 우선 모든 병장기를 내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카르타고인들은 순순히 모든 병장기를 내어놓고 자진 무장해제 하였다.
스키피오는 다음으로 모든 카르타고 인들이 도시 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하였으며, 그제서야 로마가 원하는 것이 카르타고의 멸망이라는 것을 깨달은 카르타고인들은 성문을 닫고 로마에 대치하였으며, 로마군은 카르타고에 대해 공성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예상과는 달리 무기도 없는 카르타고는 3년 이상을 항전하였으며, 카르타고 항복시 성 안에서 항전하는 이들은 노인과 부녀자 뿐이었다.
항복한 카르타고 인들은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카르타고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2) 제 3차 포에니 전쟁 이후
전쟁의 이후 카르타고문명과 그 문화는 완전히 멸망하였으며, 카르타고의 옛 영토는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속주가되었다.
한편 민족적 시련을 극복한 로마는 드디어 이탈리아 반도의 일개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세계 전체에 걸친 세계제국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로마와 카르타고의 힘의 균형으로 득을 보고 있던 그리스 및 소아시아 도시국가들은 로마의 발아래 무릎을 꿇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로마는 동부지중해 국가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세계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5세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체결하였으며, 시리아 왕과는 이집트를 양분하기로 결정했다.
로마는 필립포스를 벌하고 그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를 공격했다.
그 결과 기원전 2세기까지 로마는 그리스와 소아시아 반도를 정복하고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 거의 모든 헬레니즘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로마의 헬레니즘 세계 정복은 포에니전쟁이 시작한 사회적 변화를 가속시켰다.
로마가 거대한 영토를 정복함에 따라 공화전 초기의 도시국가적인 정치와 사회제도는 광범위하게 펼쳐있는 제국에 적용하기 힘든 불합리한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헬레니즘 세계로부터 오리엔트의 사상과 관습이 대거 로마에 소개되고 사치스러운 분위기가 팽배해졌으며, 속주로부터 값 싼 농산물과 노예의 유입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계급간의 격차가 한층 심화되어 로마는 경제사회정치분야에서 혁명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후에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유발하였다.
※ 참고문헌
로마인 이야기 2 (한니발 전쟁) -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역| 한길사| 1995.09.30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 | 한성례 | 부엔리브로(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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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0.07
  • 저작시기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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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55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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