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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산 윤선도][윤선도의 작품][윤선도의 문학][유배][은둔생활]고산 윤선도의 작가론적 및 작품론적 접근, 고산 윤선도 작품의 문학적 의의, 고산 윤선도의 작품연구, 고산 윤선도의 유배 및 은둔생활 심층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고산 윤선도의 작가론적 및 작품론적 접근
1. 작가론적 접근
2. 작품론적 관점
1) 자연관
2) 어부사시사

Ⅲ. 고산 윤선도 작품의 문학적 의의

Ⅳ. 고산 윤선도의 작품연구
1. 불교적 작품
2. 도가적 작품
3. 유교적 작품

Ⅴ. 고산 윤선도의 유배 및 은둔생활
1. 부용동 지역
2. 낙서재
3. 동천석실
4. 세연정
5. 판석포
6. 녹우당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 1993년 4월에 복원되었다는 정자는 참 엉성하다. 원형이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1000평의 바위 지대에 정자도 짓고 연못도 파고해서 꾸민 정원으로 고산이 혼자서 혹은 38년 연하의 셋째부인 설씨녀와 단 둘이서만 오르던 곳이다. 책도 보고 시도 짓고, 차도 끓여 마시고, 달구경도 했던 흔적들이 있다.
윤선도가 말년에 머물렀던 곳으로 부용동에서 제일 경치가 아름답다. 동천석실로 올라가다 보면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대 및 희황의 유적이 있다.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세운 한 칸짜리 정자는 여류 롭게 책을 읽으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윤선도가 다도를 즐기던 오목하게 패인 차바위, 바위 사이에서 솟아나는 석간수를 받는 작은 석지와 연지, 암벽 사이에서 자생하는 석란, 한사람만이 거닐 수 있는 돌계단 등 자연 그대로의 모양에 따라 여러 바위에 상징적인 이름을 붙인 유적들을 볼 수 있다. 입구에서 맞은편으로 가면 윤선도가 살았던 집터인 낙서재터와 윤선도의 아들이 기거했던 곡수당터를 볼 수 있다.
4. 세연정
전라남도 기념물 제37호, 전남 완도군 노화읍 보길도, 조선시대 조경문화의 걸작으로 불리우는 세연정은 윤선도가 보길도 유배시절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워 시를 읊고 활을 쏘며 자연을 노래했다는 곳으로 그의 어부사시사가 창작된 곳이다. 개울에 보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된 것으로 산중에 은둔하는 선비의 원림으로는 화려하고 규모가 크다. 이곳에서 15분 정도 올라가면 옥소대가 나오는데 옥소대에 올라가 무희가 춤을 추면 세연정에 그림자가 비친다고 한다.
주로 어부사시사를 창작했던 곳으로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이룬 정원의 백미로 손꼽힌다.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있는 정자로, 정자의 중앙에 세연지, 동편에 호광루, 남쪽에 낙기, 서편에는 동화각과 칠암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고산이 선비들과 어울려 놀던 유희 공간이다. 현재는 92년 12월에 복원된 세연정, 세연지, 회수담, 동대, 서대, 판석보, 토성의 일부 등 전체 3000여평의 정원 중 1000평이 남아 있다. 1036년(인조 14)에 윤선도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거처할 집을 짓고 그에 딸린 정자와 연못 등을 만든 것이 이 정원이다. 1636년은 왕이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때로, 항복을 반대하던 윤선도는 벼슬을 버리고 은거를 결심하여 해남 연동의 본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 섬에 별서를 짓고 거기에 정원을 꾸민 것이다.
정원은 크게 세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처하는 살림집이 있는 낙서재 주변과 휴식과 독서를 위해 건너편 산허리의 바위 위에 집을 마련한 동천석실 주변, 그리고 동리 입구의 세연정 주변이다. 낙서재는 서실을 갖춘 살림집으로 북향하고 있으며, 옆으로 낭음계라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낭음계의 양편에 곡수당과 무민당의 두건물을 지었다. 이 두 건물의 곁에는 넓고 네모진 연못이 있다. 동천석실은 천하의 명산경승으로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을 \'동천복지\'라고 한 데서 이름 지어진 곳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이 된다. 세연정 부근은 이 정원에서 가장 공들여 꾸민 곳으로, 해변에 바로 인접한 동구에 인공으로 물길을 조정하면서 연못들을 만들고 정자와 대를 지어 경관을 즐기도록 하였다.
연못은 곡지와 방지로 구성되는데 동구를 흐르는 내를 돌로 된 보로 막아 만든 곡지에는 큰 바위들을 점점이 노출시켰으며, 방지에는 한 쪽에 네모난 섬을 만들고 그 섬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놓았다. 방지의 동쪽 물가에는 돌로 된 네모진 단 두개를 나란히 꾸며 놓았는데, 이 곳은 무희가 춤을 추고 악사가 풍악을 울리던 자리이다. 방지 남쪽에는 나지막한 동산이 있는데 세연정은 이 동산 위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부용동정원은 윤선도가 죽자 곧 황폐하게 되었고, 3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초석이 흩어져 있을 뿐 과거의 건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주변에 인가가 산재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인적이 드물어 정원의 유적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어 연못이나 건물자리들이 완연하다. 이 정원은 건립 연대가 확실하고 유적이 온전히 남아 있는 데다 조선시대의 정원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큰 규모의 별서정원이라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높다.
5. 판석포
일명 굴뚝다리라고도 하며, 반반한 자연석으로 내부가 비도록 세워 만든 것으로, 한국 정원의 독특한 유적이다. 이것은 세연지에 물을 저장하였다가 회수담으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6. 녹우당
녹우당은 해남 윤씨의 종가이다. 윤선도의 4대 조부의 효정(호:어초은, 1476~1543)이 연동에 살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해남읍에서 남쪽으로 2km쯤 떨어진 고산 윤선도 유적지에는 해남 윤씨 종가인 녹우당과 유물관이 있다.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의 고택으로, 전라남도에 남아 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집이다. 윤선도는 42세 때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는데 효종은 즉위 후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 주었다. 1660년 효종이 죽자 수원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온 것이 현 고택의 사랑채로 원래 이 사랑채의 이름이 녹우당이나 지금은 해남 윤씨 종가전체를 통틀어 그렇게 부른다. 집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 하며 비가 내리는 듯하다고 해서 녹우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집으로 인정되어 사적 제16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녹우당에는 윤선도의 종손 14대손 윤형식 씨가 살고 있다. 사랑채는 효종이 스승인 윤선도에게 하사했던 경기도 수원집을 현종 9년(1688)에 해상 운송하여 이곳에 이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김대행(1976), 한국시가구조연구, 삼영사
민족문학사연구소 고전문학분과(1998), 격변기에 산출된 강호미학의 정점-고산 윤선도, 한국 고전문학 작가론, 소명출판
박성의(1968), 송강·노계·고산의 시가문학, 현암사
원용문(1989), 윤선도문학연구, 국학자료원
이정자(2003), 시조문학 연구론, 국학자료원
이재수(1955), 윤고산연구, 학우사
최동원(1980), 고시조론, 삼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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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0.12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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