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그 영향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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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진왜란과 그 영향에 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임진왜란

●임진왜란 배경 및 원인

●조선과 일본의 정치상황 및 군사력

●임진왜란 진행

●임진왜란이 미친 영향

본문내용

성 전투,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의 하나이다.
(5)강화회담
명나라는 다시 심유경을 한양의 일본군 본진에 보내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으며, 일본군도 각지의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진주, 보급 곤란, 악역(惡疫)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응하여 1593년(선조 26) 음력 4월에 전군을 남하시켜 서생포(西生浦)에서 웅천(雄川 : 창원)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의 진행 도중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니 치열한 전투 끝에 의병장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충청병사 황진(黃進) 등이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
1593년 음력 8월 명나라는 일본과 휴전 협상을 제의했다. 양국은 3년에 걸쳐 지루한 휴전 협상을 했고 이 과정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2. 제2차 침략
(1)정유재란의 전개
일본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화의에 나섰다. 명군도 벽제관 전투에서의 참패를 겪고 난 후 자국의 이해를 우선시하여 종전을 원했으므로 화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조선은 삼국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으므로 화의에 결사 반대하여 교섭에서 제외되었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군사 제도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의병 부대를 관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방비를 강화해 나갔다.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물러가 왜성을 쌓고 은둔하다시피 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양측은 서로 자국이 유리한 입장에서 화의 교섭을 하려 하였다. 일본은 명나라 황녀(皇女)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한반도의 남부 4도를 내줄 것, 감합 무역을 부활할 것, 조선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명나라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요구는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3년에 걸친 화의교섭은 결국 결렬되었다. 다만 협상 과정에서 조선의 두 왕자는 일본 측에서 돌려주었다.
남해안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1597년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군의 활동이 여의치 못하였다. 조선군도 전비를 갖추었으며, 명나라의 원군도 즉시 출동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조선의 남부 지방만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전라도 지방을 집중 공략하였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물리쳤고 일본 육군은 전라도 각 지역을 함락시키면서 방화, 약탈, 학살을 자행하였다. 일본군은 전공을 증명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 일본에 보냈고(→귀무덤),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마구 잡아 서양 등지에서 온 노예상에게 팔아넘겼다.
(2)일본군의 퇴각
한편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직산 소사평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면서 북상을 저지하였고, 잠시 파직되었던 이순신이 돌아와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하면서 전세는 다시 기울게 되었고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로 물러나 농성전에 돌입했다.
1597년 12월 말부터 1598년 1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은 울산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일본군은 극심한 군량 부족 상태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은 서로군·중로군·동로군을 편성하고 수군이 이를 뒷받쳐 주는 형태의 사로 병진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는 서쪽에서 순천왜성(고니시군), 사천왜성(시마즈군), 울산왜성(가토군)에 대해서 동시에 공격하는 태세였다. 그러나 왜교성 전투, 제2차 울산성 전투, 사천 전투에서 패하였다.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결국 이를 극비에 부치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쫓아 대파하여 승리했으나 전투 중에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전투에는 패배했으나 본국 철수에는 성공함으로써 임진왜란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미친 영향
1. 조선
조선은 문란하였던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 직접 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야(田野)의 황폐는 전국에 미쳤다. 또한 납속책을 시행하여 서얼허통(庶孼許通) 향리(鄕吏)의 동반직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으로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졌다. 그리고 국민의 생활은 처참하여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고 민란이 일어났는데, 이몽학의 난이 가장 큰 것이었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을 위시한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었는데, 역대실록 등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했던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한편 병제(兵制)의 재편과 무기의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얻어서 절강무예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고 훈련도감을 설치, 삼수병(三手兵)을 두어 무예를 조련시켰다. 무기로서는 원래의 무기인 궁시창검·총통·완구·화전 외에 비격진천뢰와 화차가 발명되었고 조총과 불랑기를 이용하였다.
또 국민들의 사상 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일으켜 애국심과 자아반성 등 여러 방면에서의 개선과 명나라에 대한 사대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또 전란 중 명군이 관우(關羽) 숭배사상을 전래하여 민간신앙에 영향을 주었다.
2. 일본
일본은 도요토미가 국민생활을 피폐하게 하였으므로 일본 국내에 봉건 제후의 세력이 약화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하여금 국내 정복을 쉽게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일본은 이 전쟁을 통해 조선의 선진 문물을 약탈해 감으로서 문화가 발달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표적인 것이 도자기 기술로, 일본군은 조선의 도공(도자기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도자기 제작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끌려간 조선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의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또 조선에서 다수의 백성을 포로로 하여 경작 노동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였으며, 활자(活字)를 가져가서 일본 활자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하였고, 《퇴계집》 등의 사적을 가져가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3. 명나라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소모시켰으므로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이것은 만주의 여진족에게 세력을 팽창시키는 기회를 주어서 청나라와 명나라 교체의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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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2.20
  • 저작시기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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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68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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