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요약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조선상고사요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目 次

제1편 총론
제2편 수두시대

제3편 삼조선의 분립 시대
제4편 열국 쟁웅 시대
제5편 고구려의 전성시대, 고구려의 중쇠와 북부여의 멸망
제6편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제7편 남방 제국의 대 고구려 공수동맹
제8편 삼국 혈전의 시작

제9편 고구려의 대 隋 전쟁
제10편 고구려의 대 당 전쟁

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본문내용

당의 사관들이 위국휘치의 춘추필법을 써서 모호한 몇 개 구의 기록만이 남겨두었다.
연개소문으로서야 자기가 고구려의 내정과 외교 등 모든 큰 사건들을 다 정리한 다음에 전쟁을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것은 사정이 허락지 않고 서둘러 남으로 백제와 손을 잡고 서북으로 설연타 등을 선동하여 자기 편을 만들 뿐이었다.
당태종이 중국 이외에 또 고구려가 있다는 사실을 극히 질시하여, 정관의 치세 20년간에 겉으로는 조용하고 편안하게 신하들과 치도와 치덕을 강롱하였지만 그 머리 속에는 언제나 가장 측근의 모신인 방현령 등조차도 알지 못하게 대 고구려 전쟁의 계획을 하였을 것이다.
안시성 전투는 동양 고대 역사상 큰 전쟁이었는데, 비록 동원된 양쪽 군사 숫자는 살수 전투에 미치지 못하지만, 피차 전략의 주도함과 군사의 정예로움과 물자와 기계, 장비 등의 소모는 살수 전투 때의 그것을 초과하며, 전투가 지속된 시일도 그 때보다 두 배는 되었다.
당태종이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그 유독으로 죽은 것이 명백하다. 연개소문이 중국에 쳐들어간 것도 기록에는 보이지 아니하다. 신라 때에는 연개소문을 백제의 원조자라고 하여, 그리고 그이후에는 연개소문을 자기 임금을 시해한 유교 윤리상의 적신이라고 하여, 또 사대주의에 위반한 죄인이라고 하여 언제나 박대하면서 그에 관한 전설이나 사적을 비로 쓴 듯이 없애버리기를 일삼았다. 오직 도교의 수입과 천리장성의 건축을 연개소문이 한 일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모두 사실은 <당서>의 기록들을 부연한 거짓 기록, 즉 무록이지 실록이 아니다. 연개소문은 봉건세습의 호족공치제를 타파하여 정권을 한 곳에 집중하였으니, 이는 분립의 대국을 통일로 돌리는 동시에, 그 반대자는 군주나 호족을 불문하고 이를 일거에 소탕하여 영류왕 이외 수백 대관들을 베어 죽이고, 당태종을 격파하였을 뿐 아니고 중국을 벌벌떨게 하였으니 혁명가의 기백만이 아니라 재주와 지략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죽을 때에 따로어진 인재를 골라서 자기의 뒤를 이어 조선인 만대의 행복을 꾀하지 못하고 불초자 형제에게 대권을 맡겨서 마침내 이미 이루어놓은 공업마저 뒤엎어 버렸으니 대개 그는 야심은 많았으나 공덕 公德 : 公을 위하는 도덕적 의리
이 작았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부여성충은 백제의 왕족으로서, 어릴 때부터 지모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성충은 고구려와 백제 동맹을 맺는데 성공시켰다. 백제는 안시성 전투 당시 후방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양국 사이에서 고립된 한 개의 약국이 되어 부득이 새 동맹을 바다 서쪽의 당에게서 구하게 되었다. 김춘추가 바다를 건너 당에들어가서 당 태종을 보고 신라의 위급한 사정을 진술하고, 힘이 닿는 한 모든 비사 卑辭 : 공손한 말
와 후례 厚禮 : 많은 예물
를 다하여 원병을 청하였다. 그리고 이 때 당나라 군주와 신하들의 뜻을 맞추기 위해 사대주의의 병균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의 김유신전을 보면, 유신은 전략과 전술이 다 남보다 뛰어나서 백전백승의 명장이라 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그의 패전은 감추고 작은 승리들을 과장한 거짓 기록들이다. 부여성충이나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의 자료는 모두 말살하고 김유신에 관한 거짓기록들이다.
대개 김유신은 지략과 용기가 있는 명장이 아니라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였으며, 그 평생의 큰 공은 전쟁터에 있지 않고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데에 있었던 사람이다.
부여성충은 그를 시기하는 신하들의 간언으로 의자왕으로부터 죽임을 당한다.
기원 654년, 진덕여대왕이 죽고 김춘추가 그 왕위를 이으니 이가 곧 역사에서 이른바 태종 무열왕이다. 태종이 왕이 되어서는 더욱 김품석 부처의 앙갚음을 하기에 급급했을 뿐 아니라, 또 백제의 침입이 전보다 더욱 심해졌으므로, 그 태자 법민을 당나라에 보내어 원병을 청하였다. 당은 이 때 당 태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여 신라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쳐 없앤 뒤에 다시 고구려를 같이 치기로 하고 태종의 청을 들어주었다.
백제는 백전의 나라인지라, 나라 사람들이 싸움에 익숙하고 의에 용감하였으나, 유교를 수입한 이래 일반 사회가 명분의 굴레에 목을 매었다. 성충과 흥수는 비록 외적을 탕평할 만한 재략은 가졌으나 명림답부와 같이 폭군의 목을 베어버릴 기백이 없었다. 계백과 의직은 비록 자기 몸과 가족들을 희생하는 충렬은 있었으나 연개소문과 같이 내부를 숙청할 수완이 없었다. 「솝울」이 이미 적병에게 함락되고 의자왕이 붙잡히자, 고관과 귀인은 거의 임자충상 등 나라를 팔아먹은 자의 도당이었으므로, 모두 다 그들이 지키던 성읍을 들어 적국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성충의 잔당으로 몰려서 관직에서 쫓겨났던 구신들과 초야의 의사들은 망국의 화를 구하기 위하여 각처에서 봉기하였다. 부여복신이 돌아가신 왕의 아들 풍을 맞이해 와서 왕을 삼고, 곰나루 성을 포위하여 신라로부터 양식 운반 길을 끊으니, 복신의 우명이 천하에 진동하였다. 고구려와 일본이 구원병과 화살을 보내어 도와주었다.
고구려 말년사는 이전의 사서들이 모두 당서의 거짓 기록을 채록하여 연개소문의 죽은 해를 뒤로 연장하고 요서 이서에서 획득한 토지를 삭감하고 연개소문의 생전과 사후 고구려의 대 당 관계 사실들을 위조하여 고구려의 멸망한 진상을 잘 알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곧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의 안전을 도모하려면 먼저 백제가 망하는 것을 구해야만 했는데 신당 양국의 군사들이 이미 백제를 멸망시키고 난 뒤에 소수의 군사들을 보내어 칠중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는 퇴각해 돌아갔다. 그리고 부여복신이 기병하여 백제 전국을 거의 회복한 뒤에도 도움이 못되었다. 부여복신은 고구려를 도와 멸망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풍왕과 간신들의 의해 부여복신은 죽음을 당하게 된다. 지수신이 상좌평 부여복신을 죽인 부여풍은 곧 중흥의 백제를 멸망시킨 제1의 죄인이다. 풍이 악하다는 이유로 백제를 배반하여 당의 노예가 되기에 이른 흑치상지는 곧 백제를 멸망시킨 제2의 죄인이다.
애석하게도 저자의 원고는 미완인 채로 여기서 끝났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9.12.22
  • 저작시기2008.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937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