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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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난세에 답하다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책 선정 이유

- 1부〜9부 줄거리의 개인적인 정리

- 감명깊은 내용과 느낀점

본문내용

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이 점을 항우와 유방에 대한 깊은 통찰과 비교 분석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감명깊은 내용과 느낀점
이 책을 읽으면서 《사기》가 쓰여진지 2000여 년이 지났지만 오늘날에도 영감과 통찰력을 주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이 감명깊었기 때문에 내용 정리를 하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걸렸고 분량도 생각보다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추려봤다. 첫 번째,《사기》의 <골계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초나라의 장왕은 하찮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의 충고도 잘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는 말(馬)을 좋아했는데 그의 말이 죽었다. 그래서 그는 말의 장례를 대부의 예로써 지내주라고 했고 신하들은 반발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말(馬)을 가지고 말(語)을 하는 자는 참하겠노라!" 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맹이라는 백성이 찾아와서 "말은 폐하께서 아끼시는 영물인데 임금의 예로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이웃나라의 조문단을 초청하시고 귀한 나무와 옥으로 관을 만들고 군사를 동원해 무덤을 파서 치러야합니다. 그러면 많은 제후들이 폐하께서 사람보다 말을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될 것 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왕은 잘못을 깨닫고 말의 장례를 평범하게 일반 말의 장례처럼 치르게 하였다. 지도자라 하여도 이처럼 하찮은 사람의 충고라도 잘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민주주의가 발달됐다고 하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황보다 나았던 것 같다. 두 번째, 정나라의 재상 자산은 그의 정치에 반대하는 여론이 향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의 측근들이 향교폐지를 건의했지만 그는 그 주장을 일축하며 여론을 수렴하겠다고 했다. 비난여론이 일어나면 그 비난이 전달될 수 있는 길을 터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원천적으로 향교를 폐지해버리면 비난 여론이 갈 데가 없어 '결국에 가서는 홍수처럼 터져버린다는 것이다.(방민지구, 심어방수防民之口 甚於防水)' 여론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현명하고도 민주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이렇듯 정자산은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여론과도 소통의 길을 열어두었던 열린 가슴의 정치가였다. 연예인 자살을 인간적, 사회적 그리고 구조적 측면에서 깊이 있게 생각해보지 않고 그저 '악플' 때문이라며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법을 만들어야겠다고 악을 쓰는 2,500여 년 후의 우리 정치인과 이명박 대통령을 보면 과거의 인물보다도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세 번째, 월나라 범려의 이야기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성어를 남겼다. 그는 오월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인물로 최고의 자리에서 권세를 버리고 과감하게 떠났다. 그는 떠나면서 자신의 친구인 문종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토끼를 잡고 나면 토끼를 쫓던 사냥개는 삶아 먹는다."는 말을 하며 문종에게 구천을 떠나라는 뜻의 말을 했지만 문종은 그냥 흘려듣다가 후에 구천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 일화를 보면서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자리에서 쉽사리 떠나지 못하다가 추악한 면모를 보이는 일이 많은데 범려를 보니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네 번째는《사기》에 관한 이야기는 아닌데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이다. 진시황 능원을 발굴하다가 진시황릉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다른 왕릉들은 거의 다 도굴을 당한 것에 비하여 진시황릉의 땅의 수은수치가 높은 것으로 보아 진시황릉은 도굴 당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당시 중국의 수상 저우언라이는 진시황릉 발굴에 대하여 아직 과학기술의 수준이 낮으므로 섣불리 발굴을 하지 말자고 했으며 지금까지 중국에서는 발굴을 하지 않았다. 문화재를 소중히 여기고 지키기 위해서 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사례를 보면 우리가 흔히 후진국으로 봤던 중국보다 모자라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사례는 무령왕릉의 발굴에 관한 것이다. 무령왕릉을 발굴할 때 무작정 발굴을 하다가 손상을 입히고 그러한 것들로 인해서 세계 발굴 역사상 최악의 발굴기록으로 남겨졌다.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현대를 볼 수 있는 눈을 키울 수 있었고 과제를 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공부한다는 느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과거의 사람들보다 모자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정부에 대해서는 앞으로 세계화에 앞장설 나라로서 개혁을 통해서 더욱 더 발전할 수 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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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0.01.15
  • 저작시기2009.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74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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