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과 낙랑군, 대방군의 대외관계를 통해 본 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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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조선과 낙랑군, 대방군의 대외관계를 통해 본 고대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東方文明의 起源과 古朝鮮

2. 衛滿朝鮮과 漢나라

3. 漢四郡 설치의 역사적 배경
3-1 진개(秦開)와 연(燕)의 오군(五郡)
3-2 위만(衛滿)과 번조선(番朝鮮)의 멸망

4. 漢四郡의 허실
4-1 한과 위만조선
4-2 전쟁의 결과
4-3 한사군의 진상

5. 帶方郡

6. 帶方郡과 古朝鮮과의 關係
6-1 대방군의 성격
6-2 대방군의 변동

7.나오며

본문내용

于嗣)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두 군(郡)을 평정하고는(越海定二郡) 여러 한국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하여 내려 주고 …
즉 당시의 낙랑 대방군이 한반도 내에 없었다고 한다면 결국 지금의 압록강 이북에 있었다고 해야 되는데, 그럼 고구려는 어디에 있었다는 것이며, 또 『위지』왜인전의 다음과 같은 기사도 그야말로 요령부득의 내용이 되고 만다.
(대방)군으로부터 왜에 이르려면 해안으로 물길을 따라 한국을 지나면서, 잠시 남쪽으로 가다가 잠시 동쪽으로 가다보면 그 북쪽해안(其北岸)인 구야한국(狗邪韓國)에 도달하게 되는데, …
그러니 이제는 최소한 "최소한 3세기 조위(曹魏=조조의 위나라)가 평정한 대방군은 지금의 발해안 서안(西岸)을 낀 하북성에 있었고, 따라서 낙랑군은 그에 인접한 동북부 영정하와 난하 일대에 있었다"라는 식의 주장은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다만 공손氏가 설치한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고 보는 통설이 타당하다고 하여 광개토왕비문 영락14년(404)조의 '대방계(帶方界)'도 황해도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대방군이 313년에 고구려에 의하여 축출되어 요서지역으로 옮겨진 이상, 공손강이 설치하였다는 원래의 대방군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와는 전혀 별개로 검토해야 할 성격의 것이다.
6. 帶方郡과 古朝鮮과의 關係
대방군의 성격
위 대방군은 하급관리인 읍군과 읍장을 토착거수들로 임명한 점에 있어서는 행정기구 성격을 가졌다. 이는 군현의 주민들이 대부분 토착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방군의 읍군, 읍장은 행정기구인 낙랑군 때와는 달리 자치권이 거의 없는 단순한 하급관리에 불과하였다. 또 본국에서 군사를 보내어 주둔시킨 점에 있어서는 군사기구 성격을 가졌고, 대방태수가 행정 및 군사를 함께 관장한 점에 있어서는 전통 중국군현 성격을 가졌다.
대방군의 변동
후한이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은 A.D 238년에 위나라에 접수되어 위나라 소속으로 바뀌었다가 위나라가 망하면서 진나라 소속으로 바뀌었고, 그뒤 A.D 314년경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괴멸된 후 대릉하하류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7.나오며
낙랑군이 서기 30년에 동부7현을 포기한 뒤 후한대의 지배면적은 18현으로 되는데 그것이 다시 서기 196~220년간에 남부7현이 분할되어 대방군이 신설되는 바람에 11현으로 재축소되었고 다시 晉代에 6현, 총호수 370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그 6현도 대동강 이북의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강남의 현뿐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대방군의 신설은 중국의 지배력의 강화라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르고 또 적어도 그러한 노력으로 보이지만은 아마 실정은 토착세력을 이용한 일종의 완충지대거나 그렇지 않으면 요동반도와의 육상교통이 불가능한 형세에 빠져 해상을 통한 교통의 충실화 조치였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하여튼 낙랑 · 대방군의 영역은 문헌상으로 뿐 아니라 오늘날 남아있는 동시대의 유적유물의 분포상으로도 주로 대동강 江口를 중심으로 하는 좁은 지역에 국한되어 있으며, 이 지리적인 분포가 낙랑군의 실제세력이거나 영향력을 명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현존하는 낙랑군고분들이 모두 新來의 漢人관리들의 묘 뿐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그러한 고분속에는 소위 '朝鮮人'세력가들의 그것도 들어있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 두 계통의 주민들은 귀화예맥인의 그것까지 합해서 오랜 세시일이 경과하는 동안에 민족적 문화적 정치적 특수집단으로서 주위 韓國人과는 다른 '낙랑인'을 형성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러한 전통이 서기 313년의 공식적 낙랑군 멸망 뒤에도 약 1세기 동안 뿌리깊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낙랑대방군이란 것은 실질상 광대한 지역과 절대한 정치력을 가졌던 소위 식민지가 아니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江口 일대의 조그만 조계지 같은 존재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실정에 가깝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도의 남북교통이 낙랑군에 의해서 막혀 있던 것도 아니고 그 존재가 정치군사적으로 토착한국인의 왕국건설을 방지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참고문헌>
노태돈, 『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2000 (p.70 ~ p.73)
윤명철, 『한국해양사』, 학연문화사, 2003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1998
서영수, 「대외관계사에서 본 낙랑군」, 『사학지』31, 1998
김원룡, 「삼국시대의 개시에 관한 일고찰-삼국사기와 낙랑군에 대한 재검토」, 『동아문 화』7,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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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4.20
  • 저작시기2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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