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정치와 그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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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대 정치와 그 변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4세기 중반 고구려의 위기

(2) 소수림왕대의 체제 개혁

(3) 광개토 대왕릉 비문의 내용

(4) 평양 천도

(5)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정복 사업

(6) 백제의 요서 진출(4 세기 후반의 대외 활동)

(7) 웅진 시대의 백제의 정치

(8) 사비 시대의 백제의 정치

(9) 법흥왕 때의 체제 정비

(10)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

(11) 단양 적성비

(12) 나·제 동맹

(13) 중원 고구려비

(14) 삼국의 대 중국 외교 관계

(15)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16) 칠지도(七支刀)

(17) 천리장성

(18) 살수 대첩

(19) 안시성 싸움

(20) 여·제 동맹

(21) 고구려 말 지배층의 내분

(22) 당의 한반도 지배 의도

(23) 나·당 전쟁

(24) 백제의 부흥 운동


(25) 고구려의 부흥 운동

(26) 진골 체제의 수립

(27) 신문왕 때의 귀족 세력의 숙정 작업

(28) 소고구려국(小高句麗國)

(29) 남북국(南北國)의 형세

(30) 말갈족(靺鞨族)

(31) 발해의 덩저우 공격

(32) 빈공과(貧貢科)

(33) 고구려의 관등 조직

(34) 백제의 관등 조직

(35) 신라의 관등 조직

(36) 대대로(大對盧)와 대막지리

(37) 좌평(左平) 제도

(38) 상대등(上大等)

(39) 정사암(政事巖) 회의

(40) 화백 회의

(41) 집사부(執事部)
...

본문내용

대등(上大等)·시중(侍中)·병부령(兵部令) 등 재상을 겸하고 있었다. 승관직은 정치의 자문 역할을 하는 동시에, 왕실성전은 왕권을 옹호하는 구실을 하였다.
결국, 통일 신라의 군력 구조는 강력한 왕권을 정점으로 한 관료제를 근간으로 하지만, 그 속에는 골품제나 족적 전통이 도사리고 있었다. 부족적 전통의 상대등, 왕권의 대리자로서의 시중, 그리고 군사적 실권자인 병부령 사이의 이해 관계 속에서 복잡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 견제에의 제도적 정치는 한국의 전통 사회가 가지는 특징을 보여 주어, 고려, 조선의 제도에 큰 영향을 남겼다.
(44) 발해 관제의 독자성
발해는 관제를 편성함에 있어, 당의 3성 6부제도를 모방하였으나, 그 명칭을 바꾸어 사용하여 고구려 유민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각 관부의 기능은 실제로 당의 것과 많은 창이가 있었다. 3성이 형식상 분립되어 있지만, 정당성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3성은 기능상 평등하게 분립하는 것이 아라,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을 최고 정점으로하여 좌성(선조성 장관), 우상(중대성 장관), 그리고 그 밑에 좌우 평장사-좌우사정(左右平章事-左右司政)으로 이어지는 명령 계통을 이루었다. 그리고 좌사정은 충·인·의부를 거느리고, 우사정은 지·예·신부를 거느리는 업무 분장이 이루어졌다.
발해 6부의 명칭이 충·인·의 등 5행의 덕목명을 사용한 점은 단순한 추상적, 형식적 명칭이 아니라, 유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발해 문화의 독자성을 반영한 것이다. 오히려, 전제주의에 입각한 유교적인 정치 체제를 정비한 결과일 수도 있다. 즉, 5경은 고구려의 5부족이나 신라와 당의 5경 또는 5행 사상과 연결될는지 모르며, 왕족, 귀족의 필요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15부는 이민족의 거주지와 관계가 깊을 것이며, 지방 행정의 중심지일 가능성이 높다.
이상과 같이, 발해의 관계는 당의 제도를 취하면서도 발해의 독자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45) 고구려의 5부
지방 행정 구역의 편제는 전국을 동·서·남·북 내의 5부로나누고, 각 부는 욕살(褥薩)이라고 불리는 지방 장관이 대성에 머물면서 다스렸다.
각 부에는 여러 성이 달려 있어, 각기 처려근지(處閭近支) 또는 도사(道士)라고 불리는 성주에 의하여 통치되었는데, 이것이 뒤에 중국식으로 바뀌어 군이라 칭하여졌다. 이들 욕살이나 처려근지 등 지방 장관은 모두 중앙 정부로부터 파견되었고, 그 임무는 행정과 군사를 함께 겸하고 있었으므로, 고대 국가의 지방 제도가 중앙 집권적이며, 군사적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46) 백제의 5방
지방 행정 편제에서는 전국을 5방으로 나누고, 각 방마다 방성을 두어 다스렸다. 즉, 전국을 중방, 동방, 남방, 서방, 북방으로 구분하고, 방성에는 달솔로서 임명된 방령(方領)이 700∼1200명의 군대를 통솔하면서 방을 다스렸다. 방 아래에는 군을 두었는데, 큰 방에는 10군, 작은 방에는 6,7군이 있었으며, 각 군은 덕솔로서 임명된 군장 3인이 다스렸다. 이와 같이 백제는 왕경과 지방을 군사적인 행정 조직으로 편성하였으니, 이는 고대 국가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47) 신라의 9주
신라의 발전 과정은 동시에 영토의 확대 과정이었다. 확대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는 지방 조직의 정비가 필요하였다. 신라의 지방 통치 조직의 기본이 된 것은 주·군·현이었다.
주로 통일 후의 신문왕 5년(685)에 9주로 정비되었다. 즉, 옛 신라 및 가야의 땅에 沙伐州(尙州), 揷良州(良州), 菁州(康州)가, 백제의 옛 땅에 能川州(能州), 完山州(全州), 武珍州(武州)가, 고구려의 옛 땅에 漢山州(漢州), 首若州(朔州), 河西州(溟州)가 설치되었다.
주의 장관은 문무왕 때에 군주에서 총관으로 되었는데(뒤의 원성왕 때에 도독으로 다시 개칭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군사적인 성격에서 점차 행정적인 성격으로 변화해 감을 말하는 것 같다. 주 밑에는 군(태수)과 현(령)이 있었고, 현 밑에는 촌과 향·부곡이 있었다.
(48) 소경(小京) 제도
신라는 신문왕 5년(685)에 9주의 정비와 때를 같이하여 중원경(충주), 북원경(원주), 금관경(김해), 서원경(청주), 남원경(남원)의 5소경을 두었다.
이러한 소경 제도는 피정복 국민을 회유하고 통제하는 한편, 수도의 편재성을 보충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것 같다. 이리하여, 중앙의 귀족들을 이에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결과 소경은 신라에서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49) 9 서당(誓幢)
신라의 군사력은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급격히 팽창하였는데, 삼국 통일이 완료되자 군사 조직의 재편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재편성에 있어서 중요한 방향이 된 것은 전제 왕권의 밑받침이 되는 중앙군의 조직이었다. 이리하여, 개편된 새로운 중앙의 군사 조직이 바로 9서당이었다.
서당(誓幢)이란, 모병에 의해서 조직된 군대로서, 이미 통일 전부터 있어 왔는데, 통일 후인 신문왕 때 9서당으로 완성되었으니, 이들은 왕경(王京)에 주둔하면서 국왕에 직속된 특수 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9서당은 통일 후 고구려, 백제, 말갈 등 피정복민까지도 포함하여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옷깃의 색깔에 따라 부대 명칭을 구별하였다.
이와 같이, 금색에 의하여 획일적으로 부대의 명칭을 정한 것은 9서당이 국왕에 직속된 일원적인 군사 조직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리하여, 통일 신라에서는 종래의 대당(大幢, 6정의 하나로 왕경군)에 대신하여 9서당이 대표적인 군사 조직이 되었고, 또 그만큼 왕권의 강화가 이룩되었던 것이다.
(50) 10 정(停)
중앙군의 핵심이 된 것이 9서당인 데 대하여, 지방군의 중심을 이룬 것은 10정이었다. 10정은 9주에 각각 하나씩 설치되고, 다만 국방상 요지인 한주에만 2정을 두었다. 이러한 10정을 통일신라의 주도군사적인 조직과 결합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밖에도 강주, 전주, 한주, 삭주, 명주 등 5주에 설치된 지방군인 5주서와 국경 지대에 배치된 3변수당 등 여러 군대가 있었으나, 신라 지방군의 주축은 역시 10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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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05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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