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달려라 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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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작품의 줄거리

2. 소설 속 ‘나’가 바라본 등장인물
(1) 나의 어머니
(2) 나의 아버지
(3) 나의 외할아버지

3. 키워드로 본 ‘달려라 아비’
(1) 나의 탄생
(2) 달리기
(3) 농담
(4)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나와 아버지
(5) 썬글라스

4. 상상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 그리고 현실

본문내용

스핑크스의 왼쪽 발을 돌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백십 번째 화장실까지 단숨에 오르며, 이베리아 반도로 향한다. 아버지는 정말로 시시한 것은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누구도 그처럼 놀라운 과업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의 달리기는 초인超人의 것에 가깝다. 이는 물론 그가 상상 속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가능한 것이나, 그는 여전히 '나'에게 시시함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달리기 시작한 기원에서 유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상상의 아버지가 현실과 분열되어 존재하는 시점은, 어머니의 부풀어 오른 배를 보고 집을 나갔을 때부터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생활을 감당할 수 없었을 때, 상상의 아버지는 생겨났으며 그 때부터 그의 뜀박질은 시작되었다. 그의 달리기가 '나'에게 시시한 것은 생활력의 결여에 있다. 그것은 어머니의 택시 운전과 대비된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질주하나 그 모습을 시시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것은 박봉임에도 돈을 벌어 자신을 생활케하는 어머니에 대한 존경 때문일 터이다.
동일한 상상이라 하더라도, 그 대전제로 숨어있는 현실에의 기여도가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계층을 결정하는 척도로 사용된다. 아버지의 상상이 말 그대로 '있어도, 없어도 좋을' 불필요한 것은 아님에도 그 의의는 축소되고 은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분명 유목되고 있다. 아니, 그것은 어떤 감정적인 효익을 증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방목이라 불러야 옳은 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이미지가, 상상의 세계 전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하고 울타리 쳐진 일정한 한계 속에서만 그려질 수 있다는 점에서.
물론 이것이 '나'의 잘못은 아니다. 그보다는 소설의 구조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 사실주의적 전통 속에서 상상이 가질 수 있는 자리가 처음부터 그만큼 협소했을 뿐이다.
이 소설에서 사실주의를 지적하는 것에 대해 영 동떨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비에서 이념의 문제나 정치적 목소리는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소설 속에서 독자를 향해 뚜렷하게 주장하는 바도 없다. 그러나 소박한 의미에서의 사실주의, 현실에 대한 애착과 그에 상응하는 서술적 태도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비는 사실주의적이다.
물론 형식의 파괴만이 포스트 모던적이거나, 혁신적인 문학적 태도라고는 볼 수 없다. 포스트 모던이 리얼리즘보다 우월한 시대적 경향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실주의 방법론에서 인간의 광기나 무질서적인 감정들이 그들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프로이드가 처음 무의식을 창조했을 때, 그것은 수 없이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이 무의식을 발견했을 때, 가장 작은 뉴런 조각까지 모두 분석되어 인간의 신체에 대해 아무런 신비도 남겨놓지 않았다. 아비에서의 상상은 철저하게 현실의 개인에게 억눌리고 통제되어 있다. 아버지의 이미지는 작품 속에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고 작품 외적인 현실에서부터, 몰락한 가부장적 권력에서부터 끌어내려져 발견된 것이다. '내'가 아버지와 화해하고자 하는 목적이 폭력적인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때 소설 속의 모든 유머와 감정의 조각들은 빛을 잃었다. 작가가 그런 것을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불편하게 느껴진다. 아비는 우리 세대가 아버지에 대해 가지는 혼합된 감정(애정이 뒤섞여있지만 그다지 크게 기대하는 것은 아닌)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선명하지도 강렬하지도 않다.
이 정 하
현실을 치열하게 그려내는 상상의 구현, 소설. 작가의 상상 속의 ‘나’는 상상을 하고 있다. 상상의 구현물에게 상상을 종용하는 구조의 이야기에서 어째서? 라는 의문이 든다. 아비의 딸인 ‘나’가 마음 놓고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증오하거나, 혹은 용서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캐릭터들이 갖는 성격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중 화자가 현실을 극복하거나 혹은 순응하는 등의 결론 도출이 가장 무난하고 일반적인 현실의 해방이다.
그러나 작중 화자인 ‘나’는 작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상상으로 갈등을 해소하려 한다. 나를 버리고 떠난 아비에 대해 어떤 금기도, 트라우마도 만들지 않으며 상상 속에서 그를 우스운 모습으로 바꾸어 달리게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비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 없는 사람, 나쁘면서 불쌍한 사람으로 강조하여 정적인 부분에서의 아버지,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부정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꾸로 나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외할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아버지임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독한 겁쟁이이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상처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쿨(Cool)한척 상상을 한다. 그것은 슬픈 상상이 되어선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속의 아버지는 될 수 있는 한 가장 웃겨야한다. 상상은 자신이 내면과 어떤 갈등도, 충돌도 유발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비는 소녀에게 지독하게 미움 받지도, 용서받지도, 사랑받지도 못하며 어정쩡한 관계가 된다.
이 소설은 결말이 곧 다시 전개가 되는 순환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결말이 취하는 갈등해소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소녀는 마지막까지도 아비를 쉬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썬글라스를 씌움으로써 상상에 더 두터운 막을 씌운다. 나는 너무나도 쿨(Cool)하고 싶다. 나는 너무나도 담담하고 싶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하고 싶다. 이 소설에서 중간 중간 끼워진 것처럼 등장하는 어머니의 에피소드와 외할아버지의 에피소드는, 이 소설이 말하고 싶은 아버지에 대한 것을 부정하기 위한 장막이다. 상상은 나의 방의 기제로써 어떤 현실의 고통도 담담하게 흡수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굿바이 솔로’라는 드라마에서 오영숙(배종옥 役)이 말한 대사가 생각이 났다. 「개나 소나 쿠울 쿠울. 좋아들 하시고 있네. 뜨거운 피를 가진 인간이 언제나 쿨(Cool)할 수 있을까?」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쿨한 태도는 쓴맛이 가득하다. 담담함이 오히려 처연하며 유쾌한 상상의 포장 속엔 상처로 난도질당한, 혹은 극복하는 것조차 두려운 현실이 있음을 달려라 아비의 나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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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4.21
  • 저작시기2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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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0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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