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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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프랑스혁명의 발발원인
1. 구제도의 모순
2. 재정의 위기
3. 계몽 사상의 영향

Ⅱ. 프랑스혁명의 진행과정
1. 혁명의 서곡
2. 삼부회에서 국민의회로
3. 바스티유 감옥습격
4. 봉건적 특권의 폐지
5. 국왕의 파리 귀환
6. 국가소유 재산의 경매
7. 바렌 도피사건
8. 입법의회
9. 혁명전쟁의 개막
10. 국왕, 왕비의 체포
11. 제 1공화정의 형성
12. 루이 16세의 처형
13. 지롱드파의 패배
14. 마라의 암살
15. 공포정치
16. 로베스피에르의 독재
17. 부르주아 공화정

Ⅱ. 프랑스혁명의 결과, 의의, 한계
1. 프랑스 혁명의 결과
2. 프랑스혁명의 의의
1) 혁명의 성과
2) 영국혁명, 미국혁명, 그리고 프랑스혁명
3) 새로운 사회혁명의 이상
3. 프랑스혁명의 한계

본문내용

. 이후 영국은 공화국이 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왕이 다시 전제정치를 실시하여 의회는 네덜란드의 군대를 끌어들여 다시 권력을 잡았다.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도망하여 의회는 월리엄과 그의 부인 메리를 공동왕으로 추대하였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를 명예혁명이라 부른다. 의회는 권리장전을 제정하여 영국의 입헌적 전통을 확인하고 입헌군주제를 설정하였다. 영국은 혁명과정을 통해 "법의 지배"가 성립되고, 절대적인 소유권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의회는 자신이 보증하는 "영국은행"을 설립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렇듯 영국혁명은 고유한 의미의 부르주아혁명으로 보기 어렵지만 자본주의 발전에 걸맞는 국가체제를 만들어냈다.
미국혁명은 영국이 7년전쟁 후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해 종전의 방임정책을 포기하고 과세와중상주의적 통제를 실시하여 본국과 식민지간의 관계가 악화함으로써 발생했다. 보스턴 차사건을 계기로 독립전쟁이 시작되어 1783년 빠리조약으로 독립을 승인 받음으로 끝이 났다. 미국혁명은 영국과는 달리 자연권에 호소했다. 식민지인들은 모국과의 관계를 끊었을 때 자유계약의 이름으로 그 분리를 정당화했으며 ‘독립선언"은 단지 미국인의 권리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권리임을 내세웠다. 프랑스 혁명은 그 계급투쟁이 갖는 성격으로 보아 앞선 혁명을 능가했다.
특권계급이 봉건적 특권에 사로잡혀 모든 양보를 거부했고 혁명부르주아지가 반혁명세력에 맞서 민중과 연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은 자연권에 호소하는 보편적 자유의 혁명이었을 뿐 아니라 권리의 평등을 제시하고 그것을 뛰어 넘는 평등의 혁명이었다. 그것은 유태인에게까지 시민권을 허용하고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폐지하였다 이처럼 프랑스혁명은 자유를 상실함이 없이 평등을 실현할 것인가 하는 이상을 제시하고 실험했다. 이점에서 프랑스혁명은 이후의 인류사에 본보기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3) 새로운 사회혁명의 이상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실현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그 이후의 세계가 겪을 세 가지 길을 제시 하였다.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가 그것이었다. 제헌의회 의원과 열월파가 1791년의 헌법과 혁명력 3년을 통해 제시한 길은 대의제에 입각한 자유주의였다. 그러나 특권계급의 타도와 귀족 특권의 폐지를 정당화하는 것이었을 뿐 민중을 동반자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평등은 권리의 평등이었다. 그러나 상퀼로트의 평등주의와 바뵈프의 공산주의로 권리의 평등을 보장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산악파의 국민공회가 1793년의 헌법과 여러 법적 조치를 통해 제시한 길은 사회민주주의였다. 산악파는 보통선거제를 도입하고, 노동권. 교육권. 행복의 권리를 인정하였다. 생존권이 소유권에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소유권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바뵈프의 공산주의는 혁명적 경험을 통해 탄생되었다. 그는 사회의 목표는 공공의 행복에 있으며 혁명은 모든 시민에게 "향유의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권리의 평등을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폐지와 공산주의적 민주주의의 수립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의 새로움은 단지 분배의 공산주의라는데 그치지 않고그 것을 평등주의자의 음모를 통해 실현하려고 시도했다는데 있다. 사상적으로 잘 무장한 혁명적 소수가 동정세력의 지지기반 위에서 무장봉기를 통해 국가권력을 탈취하고 "혁명적 독재"에 의해 대중의 지지를 획득한다는 "혁명적 음모"의 새로운 혁명전략은 부오나로띠를 통해 19세기에 전해졌고 블랑끼(A. Blanqui), 더 나아가 레닌(Lenin)에까지 이르는 혁명적 전통을 수립하였다
3. 프랑스혁명의 한계
프랑스 혁명을 시민계급이 일으킨 혁명이지만, 이 때의 시민은 부르주아지로서 민중과는 구별되는 개념이었다. 민중의 대부분인 농민과 노동자는 혁명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은 1차적으로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셈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지가 경제 정치를 장악하게 되었고, 선거는 제한 선거로서 유산자만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에 앞장선 농민과 노동자들에게는 아직 참정권이 없었다.
혁명의 역사는 프랑스 혁명을 시발로 하여 1848년 혁명, 파리꼬뮌을 거쳐 20세기 역사를 뒤흔들어 놓은 러시아 혁명으로 발전하였고, 20세기에는 제3세계의 혁명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소비에트의 붕괴를 기점으로 혁명의 역사는 끝을 맺고 있는 듯이 보인다. 어쩌면 이제 역사는 민중과 권력의 대립이 줄기가 되어 전개되는 시대를 마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현대의 국지전이 보편적인 민중이해와 독점적인 권력이해의 대립보다는 민족간, 혹은 문명간의 대립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혁명의 시대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범세계적인 보편적 민중이해라고 하는 추상성은 어느새 사라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범세계적인 자본의 지배와 세계체제의 불균형은 여전히 민중들의 고통을 야기하고 있으며 자본의 지배는 국가별로 지역별로 서로 다른 차원에서 민중들의 고통을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다차원적인 현상으로 인하여 민중들의 보편적 이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지라도 그 고통의 근원이 자본에 있는 한, 민중과 자본의 투쟁은 다양한 양상을 띠고 전개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근대적인 혁명의 시대는 지나갔는지 모르지만 민중들의 고통이 범세계적으로 존재하는 한 언제 우리는 또 다른 전환기적 혁명을 맞게 될지 모른다.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되기 마련인 것이다
< 참고문헌 >
민석홍 『서양근대사연구』 일조각. 1975
민석홍편 『프랑스혁명사론』 . 까치. 1988
마티에즈 A. 『프랑스혁명사』 김종철 역. 창작과 비평사. 1982
배영수 『서양사강의』 서울:한울아카데미. 1992
A 도끄빌 구체제와 프랑스혁명 일월서각 1989
미셀보벨 왕정의 몰락과 프랑스혁명 일월서각 1987
로제샤르띠에 프랑스혁명의 문화적기원 일월서각 1998
조르주 르페브르 1789년의 대공포 까치 2002
G. 르페브르 프랑스혁명 을유문화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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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03
  • 저작시기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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