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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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등이 새로운 조직의 주축이자 각 지구와 독자적인 연락을 취하고 있던 공안위원회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9월 29일 공안위원회는 그 동안 상퀼로트가 줄기차게 요구했던 최고가격제법을 만들어 곡물 뿐만 아니라 생필품 전체에 대해 가격통제를 실시하여 상퀼로트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법이 축재나 투기를 크게 억제하지는 못했지만 정부기관을 강화하고 화폐유동을 보호하여 일정 기간 동안 상품가격(商品價格)을 안정시켰고 군대와 시민 모두에게 식료품의 적절한 공급을 보장해 주었다.
공안위원회에 의해 혁명재판소의 기능도 강화되었다. 재판소의 기능이 미비했던 9월이전에 260명의 죄수중 66명이 사형을 당해 그 비율이 26%인데 반하여 10월 이후 1달 동안에 395명의 죄수중 177명이 사형을 당해 비율이 45%에 달했다. 그리고 구속자의 구도 8일 1417명에서 12월 4525명으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상퀼로트는 파리시 행정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모든 지구위원회에도 대다수가 참가하여 중요한 혁명적 협회와 단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소불의 조사에 의하면 1794년 파리지구 혁명위원회원 454명 중 임금노동자가 9.9% 상점주인, 수공업자가 63.8%인 반면에 제조업자, 임금생활자, 자유직업인, 관리등은 26.3%였다. 또한 생 끌레 드빌(Saint claire Deville)의 조사에 의하면 1793년 7월부터 1794년 7월까지 132명의 코뮌회원 중 82명이 제조업자, 수공업자, 상인이었고, 11명은 노동자, 8명은 청부업자이고 나머지 31명은 자유직업인이었다. 이와같이 혁명의 주요세력이었던 상퀼로트와의 굳건한 결합속에서 혁명정부(革命政府)는 대외전쟁에서의 승리와 반혁명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테르미도르(Thermidor)반동으로 혁명정부는 무너지고 상퀼로트와의 결속도 깨어지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결속이 어떻게 깨어지고, 그것이 테르미도르 9일에 어떻게 반영되었나?
물가와 임금의 통제를 위한 최고가격제는 파리코뮌이 1794년 4월 에 상거래를 부활시킴으로써 파괴되었는데 이것은 암시장을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와 상품가격이 협정가격보다 더 비싸지게 되었다. 한 예로 협정가격이 파운드당 22수하던 버터가 36-44수에 거래되었고, 50수하던 계란은 80-100수에 팔렸다. 이러한 경제정책(經濟政策)의 방향전환은 생산자에게는 유리한 것이었으나 영세소비자인 상퀼로트 - 특히 노동자나 봉급생활자 - 에게는 커다란 부담과 불만을 가져다 주었다. 1794년 4월 상퀼로트 중에서 가장 빈곤한 계층인 노동자와 봉급생활자가 임금인상(賃金引上)을 요구하는 소요가 일어났으나 파리코뮌이 르샤블리에(Le Chapelier)법을 적용하여 소요를 진압한 까닭에 잠시 주춤하였으나 6월에 다시 일어나서 테르미도르반동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보다 앞서 공안위원회는 1794년 3월에 벙토즈(Ventose)법을 제정하였는데 이 법은 반혁명용의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애국자에게 분배하려던 것이었다. 많은 상퀼로트들이 이 법을 환영하였으나 실제로는 실시되지 못하였고 그로 인해 상퀼로트는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3월과 4월 상퀼로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과격파인 에베르파(Heberists)와 온건한 당통파(Dantonists)를 제거하자 혁명정부와 상퀼로트와의 굳건한 결속이 금이 갔고, 이는 곧 혁명정부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에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료들이 단두대로 보내졌고, 혁명정부는 무너지게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대혁명사에서 상퀼로트의 퇴조를 의미하는 동시에 재산소유 부르조아지들의 재등장을 뜻하는 것이었다.
Ⅵ. 結 論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퀼로트는 프랑스 혁명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로, 프랑스 혁명을 시민계급에 의한 단일 혁명이 아닌 부르조아지내의 다양한 계층에 의한 복합적 혁명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구제도 말기와 혁명초기에 경제적 어려움과 부르조아지의 선동에 의해 수공업자, 소상인, 상점주인, 노동자 등 당시 파리시의 하층민인 상퀼로트가 혁명에 개입하게 됨으로써 부르조아지를 국왕과 특권계급의 저항과 음모로부터 구출하고 혁명에 있어서 부르조아지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주요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상퀼로트는 부르조아지와 이해관계의 대립이 생기게 되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간의 대립, 즉 부르조아지내의 계급분화를 가져오게 하였는데, 1791년과 1792년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상층부르조아지와 군주제를 전복시킨 민중폭동에 잘 나타나고 있다.
군주제의 몰락 후 프랑스 혁명은 다시 한번 계급분화를 맞게 되는데, 재산소유부르조아지를 기반으로하는 지롱드당과 상퀼로트를 기반으로 하는 자코뱅당과의 대립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대립속에서 상퀼로트와 자코뱅당은 굳건한 결속을 통해 마침내 지롱드당을 숙청하고 혁명정부에 의해 공포정치를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퀼로트와 혁명정부사이의 유대관계도 로베스피에르가 제거됨으로써 깨어지게 되고,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적, 경제적 위기하에서 일어나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던 상퀼로트세력의 퇴조를 가져오게 하였다.
또한 상퀼로트운동의 성격은 값싸고 풍부한 빵과 생필품의 구입이라는 경제문제가 깊숙히 스며들어 있다. 구제도 말기부터 빈번했던 식량폭동은 경제적 위기가 원인이었다. 혁명적 민중폭동의 예외적인 경우인 샹드마르스사건이나 튀일루리궁 습격사건을 제외하고는 혁명을 발전시켰던 민중폭동(民衆暴動)의 1차적 원인과 동기는 바로 빵가격의 앙등과 품귀현상(品貴現狀)으로 인한 굶주림 때문이었다. 다시말해 레베이용폭동, 베르사이유새행진, 1792년과 1793년의 연속적인 폭동은 빵기근, 아시냐가치의 하락에 의한 물가상승 그리고 낮은 임금등으로 인한 경제적 궁핍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이와같이 1787년부터 1794년까지의 상퀼로트운동은 경제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관심이 결합하여 일어난 것으로 이러한 상퀼로트에 의한 민중폭동이 혁명을 진전시켜 온 진정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 가격3,000
  • 페이지수20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01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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