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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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전통음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그릇에 따른 밥 짓기 변화

❁ 가마솥 밥이 맛있는 이유

❁ 증류식 소주와 희석식 소주의 차이점

❁ 콩의 영양성과 콩을 이용한 음식

❁ 한국전통 그릇에 대표적인 이름
= 주식용 그릇
= 반찬그릇

❁ 젓갈의 정의
= 정의
= 특징
= 종류
= 각 지방의 젓갈
= 젓갈의 필수조건
= 젓갈의 선택

❁ 사찰음식의 특징
= 특징
= 사찰음식의 재료와 약리 작용 (채소 및 산나물의 영양분석)

❁ 김치의 변천
= 어원
= 시대별 변천
= 삼국시대 전후의 김치무리

본문내용

A와 C가 다량 함유되어 있으며 비타민 E와 F가 들어있어 여성의 건강과
미용에 절대로 필요하며 소화촉진, 건위제와 철분이 많아 빈혈에도 좋으며 혈액순
환, 저혈압, 빈혈, 피로회복, 동맥경화 등 성인병치료, 예방과 여성의 미용과 다이
어트에 더없이 좋은 식품이다.
김치어원의 변천
김치의 어원은 채소의 소금 절임으로 다른 민족도 자연스럽게 방법을 채소의 저장법으로 이용하였다.
이 단순한 절임의 과정이 '담금'의 발효 과정으로 발전된 것은 식품 가공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특히 한국의 김치는 채소의 절임과 담금에다 갖가지 향신료와 양념, 고명과 젓갈을 혼합하고 맨드라미나 고추로 색깔까지 가미하여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자적인 발효 식품으로 발전하였다.
어원
김치를 의미하는 옛말은 '디히'와 '지'인데 '지는'는 지금까지도 김치의 다른 표현으로 불리고 있다.
상고시대에는 김치를 '저'라는 한자어로 표기하였다.
삼국유사에서 김치. 젓갈무리인 '저해'가 기록 되어 있으며 또 고려사, 고려사절요 에서도 '저'자를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지', '염지', '지염', '침채', '침저', '침지', '엄채', '함채 등이 김치무리로 말하는 것이다. 19세기 초의 저서인 임원십육지에는 저에 대한 설명과 함께 많은 종류의 김치가 선보이고 있다.
김치란 말은 '침채'라는 한자어에서 비롯되었다. 이 한자어는 한자와 본고장인 중국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만든 글자인 듯하다.
한편 김장의 어원은 '침장'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의 "장에 절인 순무장아찌는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는 겨우내 찬으로 쓰인다. 또한 삼봉집 권7기에서는 고려시대에 채소 가공품을 다스리는 '요물고'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 태종조 9년의 기록을 볼 때 김장을 보관하던 곳이 따로 있었으며 김장이 '침장'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대별 변천
우리 민족이 언제부처 어떤 김치무리를 담가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왔던 중국과 일본의 기록을 참고하여 김치의 유래를 살펴보면 그 시대의 김치무리에 대한 모습을 대강 알 수 있다.
중국의 '시경'에 "밭속에 작은 원두막이 있고 외가 열려 있다. 이것으로 정성껏 '저'를 담가 조상께 받치면 수를 누리고 하늘의 복을 받는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의 '저'가 최초로 기록된 김치무리로 보인다. 그 후 진나라 때 편찬된 '여씨 춘추에는 '주문왕이 저를 즐겼다는 말을 듣고 공자가 콧등을 찌푸려가며 '저'를 먹어 3년 후에야 비로소 그 맛을 즐겼다. 라고 하였고 '설문해자'의 '저는 신맛의 채소이고, 저 는 초에 절인 오이"라고 한 구절에서도 김치무리를 볼 수 있다. 또한 '주례'에는 '칠저'가 나오는데 이것은 부추, 순무, 순채, 아욱, 미나리, 태와 죽순 등으로 담근 김치무리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으로는 구체적인 조리법을 알 수 없다. 후위 말엽에 편찬된 '제민요술'에는 젖산 발효를 이용한 김치무리 12종과 초절임 김치무리 16종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리법을 추정하는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제민요순'이 편찬된 때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이므로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김치무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일본의 문헌으로도 우리의 김치무리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기원전2,3세기경에 일본 규슈 북부로 건너간 한반도인 들은 벼농사와 앞선 문화를 전하여 일본의 야요이 문화를 꽃피었고 한문, 불교 등 문화 전반에 걸친 전수가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일본의 '정창원문서'에 나오는 채소 발효 식품은 우리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 술 빚기와 기타 발효 전수 기술을 처음 전해 준 백제 사람 인번에 의해 만들어진 수수보리지는 지금도 일본인 들이 즐기고 있다. '정창원문서'에 나오는 김치무리는 소금에 절인 것, 장에 절인것, 곡물 죽에 절인 것, 술지게미에 절인 것, 식초에 절인 것, 감지 등이 있어 그 당시의 우리나라 김치무리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삼국시대 전후의 김치무리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채소를 즐겨 식용하였고 소금을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사실, 젓갈과 장 등의 발효 식품이 만들어진 시기 등을 고려할 때 삼국시대 이전부터 김치무리가 제조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김치무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이다.
"고구려인은 술빚기, 장 담그기. 젓갈 등의 발효 음식을 매우 잘 한다"는 기록은 이 시기에 이미 저장 발효 식품이 생활화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의 의하면 신문왕이 683년에 왕비를 맞이하면서 내린 폐백 품목 가운데 간장, 된장, 젓갈무리가 들어 있어 발효 식품이 상용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 시기에 산출된 채소인 순무, 외, 가지, 박, 부추, 고비, 죽순, 더덕, 도라지, 고비 등으로 소금에만 절인 것이 주된 김치무리였을 것이다.
그 밖에 이들 채소를 장에 절인 형태, 초에 절인 형태, 술지기미에 절인 형태, 소금과 곡물 죽에 절인 형태 등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런 절임법은 오늘날의 장아찌 형으로 우리나라는 풍부한 해산물과 양질의 채소, 훌륭한 발효 기술로 장아찌 형 김치무리와 생선, 곡물, 채소, 소금으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가자미식해, 북어식해 같은 식해 형 김치무리가 존재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백제 문화로서 서기600년경에 창건된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100 센티미터 이상 대형 토기들이 있다. 이것들은 대체로 승려들이 생활하였던 곳에서 출토되었다. 크고 형태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땅을 파고 묻어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대형 토기는 겨우살이에 대비한 김장독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되며 삼국시대 김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 되고 있다. 이외에도 신라시대 성덕왕 19년 에 세워져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법주사 경내에 있는 큰 돌로 만든 독은 김칫독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김치무리를 만들어 저장한 것으로 생각하면 김장의 기원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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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05
  • 저작시기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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