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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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Chapter 1. 혁명정권의 등장
Chapter 2. 대마도 정벌
Chapter 3. 세종의 북진정책

Chapter 11. 일본함대의 침략 운양호 사건

본문내용

한강으로 수송되던 도성의 생필품 반입은 일시에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병인[丙寅],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비록 짧은 것이었으나 이 사건이 바로 도성[都城]의 인후부인 강화도에서 발발하였던 관계로 도성의 민심은 큰 혼란의 와중에 휘말려들게 되었으면 정국도 극도의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미양요의 과정과 결과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고종[高宗] 8년(1871년) 미국의 아시아함대가 1866년 8월의 제너럴셔먼호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開港]시키려고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 뒤 리델 신부를 통해 각국에 알려졌으며 미국은 즉시 베이징에 있는 미국 공사에게 훈령을 보내어 조선에 대해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고,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고종 8년(1871)인 신미년 4월에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로 하여금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병력을 이끌고, 5월 16일 조선원정길을 떠났다. 로저스는 조선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 무력시위와 함께 군사작전에 의해 강제로 협상을 진행시키겠다는 책략을 수립한 뒤 인천 앞바다에 침입하였다.
조선정부는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군을 격퇴한 이후,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방을 강화하고, 강화도 연안의 경비를 튼튼히 하고 있었다. 어재연 등이 이끄는 조선군은 광성진을 공격해 온 미군을 맞아 광성진[廣城鎭]과 갑곶쪽에서 백병전[白兵戰]까지 벌이는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광성진을 일시 점령하였던 미군은, 조선군민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40일 만에 우리나라에서 물러가고 말았다.
미국의 강화도 침략은 제국주의[帝國主義]적 침략전쟁이었다. 다만,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 다른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는 다르다. 미국은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시켜 개항을 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침략하였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강력한 쇄국이양정책을 이기지 못하여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한다. 조선은 미국함대의 철수가 미국이 패하여 돌아간 것으로 간주하였고, 더욱 문을 굳게 닫게 된다.
Chapter 11. 일본함대의 침략 운양호 사건
강경한 통상거부정책을 취해 오던 대원군(大院君)은 집권 10년 만인 1873년(고종 10년)에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과 명성황후일족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고종이 이미 20대의 성인이 되었고, 서원 철폐에 대한 최익현(崔益鉉) 등 지방유림의 반발과 황후 및 개화파의 통상론에 밀려 대원군이 실각한 것이다. 이제 국정의 방향은 대원군이 이룩한 내정개혁과 방어정책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왕조의 기틀을 유지하면서 외국의 과학기술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정책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중국 청나라 말기에, 태평천국 운동 이후에 일어난 양무운동의 기본 사상. 중국의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하되,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자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중국 청나라에서 일어난 근대화 운동. 태평천국 운동과 애로호 사건 등에 자극을 받아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이 주동이 되어 군사, 과학, 통신 따위의 개혁을 꾀하였다.
이것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서양의 과학, 기술을 빌려 왕조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자강정책[自强政策]이었고, 전면 서양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성격의 개화 논리는 차츰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우리의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 즉 동도(東道)는 지키면서 근대 서양의 과학기술, 즉 서기(西器)는 받아들이자는 이론으로 구체화된다.
이렇듯 변화된 국내사정을 안 일본은 이것을 그들의 침략적 의도에 입각한 통상조약을 강요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였다. 이 시기의 일본은 메이지이신(명치유신 : 明治維新)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하였고, 이러한 근대화를 바탕으로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키자는 정한론(征韓論)이 일어나던 때였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1875년 중무장한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시켜 조선 측의 발포를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일본 내의 반한감정을 고취시키고, 대규모의 군대파견을 준비하면서 수교회담[修交會談]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조선 정부와 일본 정부는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정식 이름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을 맺었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근대 국제법상 처음으로 외국과 체결한 조약이었지만 불평등조약으로 그 뒤 일본의 조선 진출과 침략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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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7.31
  • 저작시기20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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