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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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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일본문학과 물어문학

Ⅱ. 일본문학과 군기문학

Ⅲ. 일본문학과 일기문학

Ⅳ. 일본문학과 정인문학
1. 성립배경
1) 정인 계급의 발흥
2) 인쇄기술의 보급과 학교 교육
2. 특색
1) 현세주의
2) 향락주의
3) 웃음의 문학

Ⅴ. 일본문학과 전후문학

Ⅵ. 일본문학과 여성문학

참고문헌

본문내용

방법을 언급해두고 싶다. 일본 문학의 한 장르인 모노가카리란 \'가타리테(語り手)\'라는 일종의 화자를 등장시킨 독특한 형식의 문학작품을 지칭한다. 이는 에마키(繪卷)라고 해서 이야기를 시녀가 읽으면, 그에 대응하는 그림을 귀족 아가씨들이 보는 독서 형태에서 비롯된 장르로서 음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겐지모노가타리』의 탄생을 계기로 읽고 있는 사람이 이야기 속에 자유롭게 참가하여 \'가타리테\'가 될 수도 있는 독특한 형태의 산문형식으로 정착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천여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현대문학으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에게 『키친』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가 왕조 모노가타리 문학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 독자는 과연 얼마나 있을까?
바나나는 자신의 작품에서 문법을 무시했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기존 문학작품의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말투나 비유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바나나가 현대 일본의 언어 실태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옹호하면서 \'순정 만화 문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평가야 엇갈리지만 바나나의 작품은 분명 21세기를 향해 나아가는 일본 문학의 현재태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바나나 작품의 특징은 가타리테의 존재에 있다. 즉 가타리테가 과거를 회상하듯이 이야기하는 형식을 휘하고 있는데, 그러한 가타리의 방법은 왕조 모노가타리의 체취를 진하게 담고 있다. 단지 모노가타리의 가타리테가 전지적이고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과는 달리, 바나나의 가타리테는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엄격히 구분해서 이야기한다. 만약 들은 이야기의 경우는 가능한 그대로 혹은 말한 사람을 등장시켜 그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감정에 개입할 수 없다는 현대 작가인 바나나와 왕조 여성 사이에 엄존하는 천여 년의 세월 속에서 달라진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가타리의 방법을 기반으로 중세를 대표하는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는 첫머리에서 불교 논리에 바탕을 둔 \'제행무상(諸行無常)성자필쇠(盛者必衰)\'에서 시작하여 헤이케에서 겐지로의 권력이양의 과정을 전하고 있다. 중세가 끊임없는 전란의 시대로 일컬어지느니 만큼, 헤이케의 멸망을 주제로 비파법사(琵琶法師)라 불리는 맹인 스님들이 비파를 반주 악기로 삼아 전국을 유랑하며 이야기하던 것을 중류 귀족과 협력하여 만든 작품이 『헤이케모노가타리』이다.
이러한 작품을 흔히 \'군키모노가타리(軍記物語)\'라고 하는데, 일종의 역사 모노가타리이다. 단지 왕조시대의 역사 모노가타리가 한 명의 영웅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집단과 집단의 전쟁이 빈발하게 되는 중세에는 전쟁의 결과에 따라 한 집단 내지 일족이 흥하고 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헤이케모노가타리』는 무주구천을 떠다니는 패자들의 영혼을 위무하는 종교적인 심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수가 있는데, 이는 비파가 죽은 영혼을 부르는 현악기라는 사실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진혼\'의 의미와 함께 중세라는 시대적 분위기에 비롯된 \'무상\'을 주제로 삼고 있기도 하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점은 맹인 비파법사가 음률시인처럼 전국을 다니면서 일반 민중에게 헤이케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다녔다는 사실이다. 즉 문학의 향유자가 왕조시대에는 귀족에 한정되어 있었다면, 중세에는 그것이 서민에게까지 확대되어 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세는 전란의 시대이니 만큼 역시 그 주인공은 무사이다. 그리고 중세는 \'노오(能)\'를 중심으로 한 극문학이 태동한 시기였다. 이 양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열도가 몽골 습격의 공포에 떨고 있던 13세기말은 예능사에서는 중요한 전기였다. 즉 종교와 예능의 경계가 무너지고, 중세 예능이 일제히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면 잇펜(一遍)의 오도리 넨부쓰(踊る念佛)처럼 노래부르고 춤추면서 불법을 설교하는 형태가 일본 전국을 휩쓸고 다녔으며, 헤이케모노가타리를 이야기하는 맹인 비파법사도 그러하였다.
그러한 일본 전체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우스꽝스러운 흉내를 중심으로 하던 사루가쿠(猿樂)에서 노오의 형식이 태동하기 시작했고, 14세기에 들어와 간아미(觀阿彌)제아미(世阿彌) 부자에 의해 완성을 맞게 된다. 특히 극형태의 사루가쿠가 오늘날과 같은 양식성이 강한 가무 중심의 노오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제아미 때부터였다. 간아미의 노오가 구체적인 인간끼리의 갈등을 주로 다루었다면, 제아미는 고전 세계와의 조응을 통해 개체적인 한 인간의 심층을 무게 있게 파헤쳐 나가는 형식을 취했다.
노오 양식의 완성은 제아미의 성장 배경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1375년 이마쿠마노(교토 시내)의 노오 무대를 관람한 당시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12세의 미소년 제아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노오의 적극적인 후견자를 자청하고 나섰다. 다음 해에는 당대의 최고 문화인인 니조 요시모토도 제아미에 끌려 그의 귀족 교육을 담당하고 나섰다.
제아미는 당시 절의 지고(稚兒, 절이나 귀족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는 어린애로 대개 남색의 대상이 됨)로 있었다. 이는 아마 아버지 간아미가 장래 노오가 문화의 본산인 교토로 진출할 수 있도록 아들에게 미리 귀족의 취향에 맞는 교양을 익히도록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왕조시대의 여자 모습을 하고 있던 지고는 그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왕조미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존재였으므로, 제아미의 지고 경험은 노오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무사로서는 처음으로 교토에 정권을 세운 아시카가 쇼군가(家)를 후견인으로 삼아 제아미는 무가의 오리지널 예술 형성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새로운 노오의 세계를 개척해나갔다. 단지 그 방향은 지식계급인 기존 귀족의 취미에도 걸맞은 고전문학적인 노오였다.
참고문헌
김문길 외 - 일본문학 이해, 형설출판사, 1998
신선향 - 일본문학과 여성, 울산대학교출판부, 2005
일본고전문학전집 今昔物語集一, 소학관, 1971
정인문 - 문학과 일본문학, 도서출판 영한, 2001
玉井幸助 - 일기문학개론, 目黑書店, 1945
志賀直哉 - 城の崎にて, 小僧の神, 角川文庫,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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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1.12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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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38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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