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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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춘추전국통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춘추패자(春秋覇者)의 출현 : 춘추의 오패(五覇)
1) 춘추․전국 시대의 분위기와 특징 : 분열에서 통일로
2) 주왕실 권위의 실추 : 주왕실을 무시한 정(鄭)
3) 제 환공(桓公)의 패업(霸業) : 관중(管仲)의 개혁
4) 초(楚)와 진(晉)의 대립
5) 진(晉) 문공(文公)의 패업
6) 초 장왕(莊王)의 패업
7) 진과 초의 대항쟁 : 통일의 움직임
8) 오(吳)와 초(楚)의 쟁패

2. 전국칠웅(戰國七雄)의 각축
1) 진(晉)의 분열 : 삼진(三晉)의 성립
2) 위(魏)의 대두
3) 제(齊)의 강성
4) 연(燕)의 활약 : 장군 악의(樂毅)
5) 진(秦)의 성장 : 상앙의 변법
6) 전국시대의 외교전 : 합종책(合縱策)과 연형책(連衡策)
7) 진의 진출
8) 진의 중국통일

본문내용

려워 연으로 하여금 제를 토벌하여 보복하도록 권유하면서 조를 떠났기 때문에 이로써 동맹은 와해 ⇒ 그러나 합종책은 당시 여러 제후국에 수용되어 B.C.318년에는 6국 연합군이 진을 공격해서 함곡관까지 진출했지만 아무런 전과도 없이 끝남
7) 진의 진출
① 이 무렵부터 진은 동방진출의 배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동안 서방경략에 경주
② 서남쪽의 사천지바 - 파(巴)촉(蜀)저() 3국이 분립항쟁 → B.C.316년에는 사마조가 촉을 멸망시킴 → 이어서 파저를 병합하여 사천일대를 평정 ⇒ 파촉 지역은 물자가 풍부한 곳으로 진의 국력증대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됨
③ 서북쪽으로는 경수 상류에 위치 - 자주 진을 친입하던 이민족 의거를 공격 → B.C.314년에 이들의 25성을 함락 → 감숙성 경양 지방까지 진의 영토를 확장 ⇒ 후방의 근심거리를 제거
④ 진의 동방진출
- 장의를 초에 사자로 파견 ⇒ 초 회왕에게 제와 단교한다면 예전에 진이 초로부터 탈취했던 지역[상(商)우(于)의 토지 600里]을 반환하겠다고 설득 → 회왕은 그 제안에 따라 제와 단교 → 장의는 귀국한 후 약속을 이행하지 않음 → 회왕은 격노하여 진으로 군대를 출정 → 그러나 반대로 진에게 단석에서 패배하여 초군 8만여가 참수(B.C.312년) … 회왕은 총병력을 동원하여 진으로 진공하여 남전까지 육박했으나 한위가 초의 등(鄧)을 급습했기 때문에 급히 군대를 퇴각시켰다.
⇒ 이 전쟁의 결과 : 초는 한중을 잃게 되고 이후 초의 세력은 점차 쇠락
⑤ 장의는 다시 각국을 설득하여 진과 동맹을 맺게 하는 등 연형책을 추진 → 혜문왕 다음의 무왕(武王 : 재위 B.C.310~307)이 장의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제후국은 진과의 동맹을 파기 → 합종책을 택하여 진에 대항 →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헛되이 진은 B.C.304년, 한의 요충지인 의양을 장악하고 낙양으로 육박함 → B.C.299년, 초의 회왕을 체포하여 진으로 압송
⑥ B.C.296년에 회왕, 진에서 객사 → 초는 커다란 혼란에 빠짐 → 마침내 진은 백기를 장군으로 하여 B.C.293년에 한위의 연합군을 이궐에서 패퇴시키고 24만의 병사를 참수 → B.C.291년에는 초의 등을 함락시키고 남양일대를 장악 → B.C.288년에는 조의 경양을 함락 → B.C.286년에 위의 옛 근거지인 안읍을 탈취하게 되자 위는 하동지역도 상실한 채 산서지방에서 퇴각
⇒ 이 과정에서 진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던 것은 동방의 제뿐이었음
8) 진의 중국통일
① 진은 제가 다른 5국을 후원할 가능성을 경계
- B.C.288년. 제[王]가 동제(東帝), 진[昭王]이 서제(西帝)가 되는 것, 즉 장래 천하를 양분할 것을 약속 → 그러나 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호(帝號)를 버리고 합종책을 택하여 진에 대항하기로 결정 → 이 때문에 진은 조위에게 점령지의 일부를 반환하는 등 제와 다른 제후국 사이의 이간을 획책하면서 한편으로는 여러 제후국과 결합하여 제를 공격
- 연의 악의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에 가담하여 제를 공격(B.C.284년) → 이후 제는 점차 예전의 세력을 상실 → B.C.280년, 초의 검중을 공격 → 초는 상용과 호북성 운현 서쪽의 한수 상류지역을 대신 내주게 됨 → 이듬해에는 진의 대군이 남하하여 초의 근거지인 영을 함락시키고 초 선왕(先王)들의 능묘를 파괴 → 초는 멀리 동쪽의 진(陳)으로 근거지를 이전 → 그 결과 초는 하남호북 일대와 호남의 대부분 지역을 상실하고 동쪽의 안휘강서강소절강과 호남의 동부만을 영유
② 진은 북쪽으로 조(趙)를 침공하여 B.C.288년에 경양을 점령 → 다시 B.C.282년과 B.C.280년에 연이어 출정 → 조에서는 혜문왕(惠文王 : 재위 B.C.298~266)휘하에 평원군(平原軍 : 公子勝)이 뛰어난 재상으로 정치를 담당하고 염파와 인상여조사 등의 정치가와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강력하게 저항(특히 B.C.270년에는 조사가 알여(閼與)에서 진군을 대패시킴) → B.C.262년. 마침내 양국의 군대는 한의 상당을 사이에 두고 장평에서 대치 … 당시 조의 장군 염파는 강력하게 진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때문에 진은 우선 조의 효성왕(孝成王 : 재위 B.C.265~244)이 즉위하는 와중에 밀사를 잠입시켜 효성왕과 염파 등 군신 사이를 이간시키고 장평의 수장을 조사의 아들인 조괄로 교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 B.C.260년에는 마침내 조군을 패퇴 → 조군 40만 항복 → 진의 장군 백기는 일단 조군의 항복을 받아들였지만 조군의 위력과 반란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40만 병사 모두를 땅 속에 묻어 죽이고 겨우 240명만을 조로 돌려보냄
③ 이듬해 진의 대군은 조의 근거지인 한단으로 진격하기 시작 → 그러나 조의 재상 평원군은 부인이 위(魏)의 재상 신릉군과 오누이 관계인 것을 이용하여 신능군을 설득해서 위의 정예방 8만을 원조받음 + 초의 공족(公族)인 춘신군 황헐에게도 군대를 지원받아 진군을 협공하여 대패시킴
④ 장평에서 조의 군사 40만을 묻어 죽인 사건은 각 제후국 사람들에게 커다란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진에 대한 저항의식을 상실하게 만듬 → 이후에는 진이 일방적으로 진격하는 시대
⑤ B.C.447년에는 채(蔡)가 초(楚)에게, B.C.375년에는 정(鄭)이 한(韓)에게, B.C.447년에는 송(宋)이 제(齊)에게, B.C.256년에는 주왕실이 진(秦)에게, B.C.249년에는 노(魯)가 초(楚)에게 멸망 ⇒ 서주 이래 전통을 이은 제후국들이 점차 소멸하면서 시대상이 완전히 바뀌게 됨
⑥ B.C.246년에는 진왕(秦王) 정(政 : 후의 진시황)이 즉위
… 그는 법가 정치가인 이사를 재상으로 기용하여 법치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추진 ⇒ 이 정책은 진의 새로운 점령지에도 철저하게 시행
… 대외적으로는 왕전몽염 등 명장을 출정시켜 우선 B.C.230년에 한(韓)을 멸망시키고 이어서 B.C.228년에는 조(趙), B.C.225년에는 위(魏), B.C.223년에는 초(楚), 이듬해에는 연(燕), B.C.221년에는 마지막으로 제(齊)를 멸망시켜 중국통일을 완수
▶ 참고문헌
「中國歷史」상권, 李瑾明, 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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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2.01
  • 저작시기2009.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4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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