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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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백가쟁명(百家爭鳴)
사(士) 계층의 정치참여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등장
학문과 사상의 황금 시대
중국 여러 사상의 기초를 이루다

2. 묵자(墨子)
사회혁명적인 상현(尙賢)주의
인(仁)을 뛰어넘는 겸애(兼愛)
혈족제사회에 대한 도전
분석논리적 표현과 격렬한 반(反)문화주의
몰락과 부활

3. 직하학사(稷下學士)
논리학의 성행
종횡가(縱橫家)와 명가(名家)

4. 노자(老子)
『노자』의 성립전설
현실도피사상의 형이상학적 체계
이상사회=무명(無名)의 농촌 공동체
노자의 형이상학

5. 장자(莊子)
소지(小知)와 대지(大知)
자유인간
진위(眞僞)-시비(是非)
피치자(被治者)의 철학

6. 맹자(孟子)
양(楊)-묵(墨)의 감각론
양-묵의 이(利)에 도전
중국 최초의 혁명론
이상으로써의 선양(禪讓)과 현실의 방벌(放伐)을 시인함
모순을 내포한 공상적 사회주의
성선설(性善說)
호연지기(浩然之氣)

7. 순자(荀子)
전국사군(戰國四君)
식객(食客) 수천인
전체 고대사상의 체계화―『순자(荀子)』
아리스토텔레스적 인간론
성악설(性惡說)

8.한비자(韓非子)
‘예(禮)’를 ‘법(法)’으로 치환하다
실증적 귀납논리학
진(秦) 통일제국을 성립시키다.
순자의 공과(功過)

본문내용

) 등의 논리학 등을 모두 통합하는 대사상가가 되었다.
묵자의 영향을 받은 뛰어난 논리학자이기도 했던 순자의 논리학은 아직 분석적 논리학의 색채가 강했지만, 한비자의 논리학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실증적 귀납논리학
앞에서 묵자가 논리학적 사고방식의 기초를 형성하고 이 묵자의 영향을 받아 나온 것이 명가(名家), 즉 논리학파라고 말했는데, 유명한 것은 순자보다 시기적으로 조금 앞서는 공손룡(公孫龍)이 ‘백마(白馬)는 말(馬)인가’라는 명제를 제출한 것이다. 즉, 말(馬)이라는 것은 형(形)에 붙여진 개념인데 비해 백(白)이라는 것은 색깔에 대해 세운 개념이다. 따라서 ‘백마(白馬)’라는 것은 이미 단순한 말이 아니라는 이론을 세웠다. 이는 궤변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사실 중국에서는 밤색털의 말이나 잡색(雜色)의 말은 적고 백마(白馬)는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백마가 말이 아니라는 것은 말이 말이 아니라 하는 것과 같았다. 거기에서 명가(名家) 학파의 궤변성이 잘 드러난다.
명가(名家)는 명(名), 즉 개념과 실(實), 즉 존재의 관련에 대해 이처럼 궤변을 농(弄)함으로써 실제로는 명과 실, 개념과 존재의 관계에 대한 의식을 높혔던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 순자는 인식론적으로 명실(名實)의 문제를 다루어 객관적 존재인 실(實)에 대해 이것과 명(名), 즉 개념의 일치를 구함으로써 지식이 성립한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이는 주관의 선천적 사물 인식능력에 의해 보장되는데, 그러한 개념은 다시 말하면 인간이 일종의 사회적 약속에 의해 결정된 존재라는 사회학적 인식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종의 사회학적 인식론이긴 하더라도 논리학으로서는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전국 말기의 제후(諸侯)들이 신하가 상주(上奏)하는 말이나 잡다한 유세가가 주장하는 이론이 어느 것이 진리인지 판단하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었을 즈음 한비자는 이같은 군주나 대신(大臣)들에게 이렇게 설파한다.
“그들이 주장할 때 말하는 개념, 즉 명(名)과 사실로써 나타나는 결과, 즉 형(形)을 참조해야만 한다. 서로 참조하여 그것이 일치하면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생긴다. 거기에 나타난 사실은 세 가지 실례보다는 네 가지, 네 가지보다는 다섯 가지로 가능한 만큼 다수를 들어 검증해 봄으로써 한층 진리에 다가서게 된다.”
당시 명가(名家)들의 끝없는 추상적 논쟁, 오히려 궤변에 속하는 이론의 공허함에 정치가들은 정나미가 떨어져 있었는데, 한비자는 위와 같이 실례에 의한 실증적 귀납논리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실례로써 비판하여 검증하면 현실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의론을 내세웠다.
진(秦) 통일제국을 성립시키다.
물론 한비자의 귀납논리는 순수하게 학문적인 것은 아니어서 군주가 한 나라의 정치를 행하는 데 신하나 인민을 감찰관리하기 위한 실제적 방법으로써 저술된 것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귀납론적 논리―이른바 실증주의실험주의 이론이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끝없는 논쟁에 일단락을 짓는 기회를 마련했다.
한(韓)나라에서는 왕자(王子)임에도 불구하고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시되지 못했던 한비자가 기원전 234년 위와 같은 논리학을 지니고 진(秦)에 들어가 시황제(始皇帝)에게 이를 설파했다. 그는 대단히 위대한 학자였지만 진(秦)에서 시황제를 섬겼던 동문(同門) 이사(李斯)의 방해를 받아 비명(非命)의 죽음을 당했다.
이사는 진(秦)에 들어가 결국 재상이 된 인물이다. 진(秦)은 그의 ‘헌책(獻策)’을 통해 6국을 쓰러뜨리고 중국통일을 완성했다. 한비자의 법가이론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이었다. 그의 이론은 진의 관리가 되어서 시황제를 도와 대신(大臣)의 지위에 오른 이사에 의해 비속화(卑俗化)되고 형식화되어 진(秦)제국의 기초를 다지는 데 이용되었다.
중국고대의 제자백가 사상을 통합하고 아울러 예(禮)를 국가통치의 최고원리로 삼은 순자의 정치철학이 문제(門弟)인 한비자(韓非子) 및 이사(李斯)를 매개로 하여 진시황제(秦始皇帝)의 통일제국을 낳았다.
순자의 공과(功過)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순자가 예(禮), 즉 법(法)을 바탕으로 한 엄격한 지배를 주장한 것은, 본래 춘추에서 전국에 걸쳐 3세기 이상에 달하는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된 내란국내전쟁을 종결시키는 데는 공자나 맹자처럼 성선설(性善說)에 근거하여 인간의 선의(善意)를 신뢰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국내전쟁을 평정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성립시킨다는 것은 전국 말기에 있어서 전체 중국인민의 희망이었다. 이 희망을 하루빨리 실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공자맹자와 같은 성선설(性善說)을 기반으로 한 왕도정치(王道政治)로는 불가능했다. 그 같은 생각에 도달한 결과 유교의 전통인 성선설을 정면에서 반대하고 성악설을 세워 법률의 힘을 배경으로 한 강제로써 국가를 통일시키는 방향을 택했다. 그것은 전국시대 말기의 중국에 있어서는 극히 적절한 학설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순자의 학설을 바탕으로 해서 한비자(韓非子)이사(李斯)를 통해 민중이 바라던 통일제국이 실현된 것이다. 따라서 순자는 중국고대사에 있어서 매우 진보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아야 한다.
후세의 유교에서 순자는 법(法)을 중시했다는 점과 예(禮)를 법(法)으로 바꾸어 나가려 했다는 점 때문에 성선설(性善說)에 의거하는 유교의 주류가 아니라 오히려 이단적인 학설로써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전국시대 당시에 있어서는 극히 중요하고 진보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렇기는 해도 순자(荀子)의 이론은 자칫 잘못되면 학문을 정치에 종속시켜 유교를 중국 전제왕조의 시녀로 만들고, 민중을 무력화하여 압정에 복종시키는 권위주의 윤리로 변질될 위험성이 있었다. 때문에 통일 국가를 낳았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인 역할을 담당했지만, 성립된 전제왕조, 즉 왕조국가율령국가의 문화와 학문사상을 무력화하고 민중을 무력화하여 압정에 복종시키는 권위주의 체제로 만든 점에서는 커다란 역작용을 끼쳤다고 비판하는 학자가 많다. 사실 결과적으로는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전국시대의 쟁란에 종지부를 찍는 원동력이 된 점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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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23
  • 저작시기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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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5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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