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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기도 도당굿][이충선][이용우][오수복][조한춘]경기도 도당굿의 의미, 경기도 도당굿의 남무와 여무, 경기도 도당굿 이충선, 경기도 도당굿 이용우, 경기도 도당굿 오수복, 경기도 도당굿 조한춘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경기도 도당굿의 의미

Ⅱ. 경기도 도당굿의 남무와 여무

Ⅲ. 경기도 도당굿 이충선

Ⅳ. 경기도 도당굿 이용우

Ⅴ. 경기도 도당굿 오수복

Ⅵ. 경기도 도당굿 조한춘

참고문헌

본문내용

앓던 사람에게 불침을 놓으니 죽지 않을 수 없었다고 조한춘은 회고한다. 조한춘은 다른 한편, 아버지 조백진이 인다리로 말미암아 죽었다고도 증언한다. 두루 아는 바와 같이 무당굿을 하는 사람에게 무업을 못하게 하여 다시금 무업을 잇도록 하는 죽음이 수반되는데, 이를 인다리라고 한다. 본래 어머니 양백련은 무가계 출신이다. 영종도의 대표적인 세습무가계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조씨 집안에서 무업에 종사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해서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다.
조한춘은 그 이후에 세습무가계가 있는 영종도에서 자라났다. 다른 조사자에 의하면 어머니 양백련이 재혼을 하여 의붓아버지 김종환에게 도당굿을 배웠다고 했으나, 이에 대해서는 필자에게 그렇지 않다고 부정했다. 김종환은 부천의 유명한 무당이었을 따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한춘의 구연 특징이 딱 부러지게 진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필자 역시 단정 지어 논할 수 없다. 다만 수차례에 걸쳐서 현지 조사에 임하면서 다져 물었으니 불명확한 대목은 그대로 두고 논의할 수밖에 없다. 김종환의 의부이며 그에게 전수받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조한춘은 굿판에 나서면서 틈틈이 악기를 배웠다. 조한춘이 악기를 배웠던 대표적 인물로 다음과 같은 인물을 꼽았다. 이덕만, 양경원, 이태순 등이다. 이덕만(李德萬)은 나라굿을 담당하는 인물로 남한산성에서 악수(樂手) 노릇을 하는 인물인데, 그에게서 갖가지 굿거리와 해금피리 등을 배웠다고 한다. 양경원(梁慶元)은 대금이나 피리의 명수였는데, 통도사 절에서 피리를 배웠다고 한다. 양경원은 조사 자료에 따라서 양계원(梁啓元)으로 표기되는데, 동일 인물인지 다른 인물인지 판별하기 어렵다. 이태순(李泰淳)은 도배 이씨로서 수원 지역의 대표적인 세습무가계 화랭이인데, 그에게서 피리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태순의 단골 지역이 기조사자료 보고서에는 안산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도 준신할 수 없는 처지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한춘은 일정 기간에 걸쳐서 전통적인 화랭이 밑에서 갖가지 기예와 악기를 익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충청도의 대표적인 악사였던 한성준(韓成俊)에게서 장구를 익혔다고 하는 사실을 미루어 보더라도 이상의 언급은 신뢰할 만하다.
조한춘의 나이 21세 때에 무가계 출신인 이연순과 결혼한다. 이연순은 어머니인 서간난과 함께 무업을 하고 다니던 여자였는데, 굿판에서 만나 인연을 맺고 다른 여자는 모두 마다고 하면서 이연순과 결혼하였다. 조한춘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저분에게 시집을 간다고 해서’ 결합되었고, 조한춘 역시 ‘도당굿판에서 밤새 굿을 하면서 일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한춘의 나이 24세 때에 시골 구장에게 연락이 와서 집에 갔다가 곧 바로 징용에 끌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군 8819부대, 일명 요시사와부대에 배속되어 중국 광동에 이르는 머나먼 징용 길에 올랐다. 중국 광동에서 해방을 맞이했는데, 불행하게도 연락선이 오지 않아서 그곳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국악예능인이라는 신분증을 감추고 있다가 예능에 뛰어난 최덕순을 만나게 되어 함께 연극부를 맡아 위문 공연을 하면서 예능을 계속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많은 여자를 거느리고 예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조비끼니라는 군표를 가지고서 돈도 엄청나게 긁어모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고국에 있는 처와 자식을 보고 싶어서 귀국선을 타고 서울에 오니 이미 625전쟁이 나서 빨갱이를 만났다고 한다.
우여곡절을 겪고서 조한춘은 계속 도당굿에 종사하면서 화랭이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조한춘은 도당굿판에서 선굿꾼 노릇도 하고, 악사로서 장구, 피리, 해금 등을 연주하여 음악에 일가를 이룬다. 특히 조한춘의 장구 솜씨는 정평이 났으며, 그의 올림채 가락은 독보적이라는 평을 얻었다. 그 까닭은 그가 굿판에서 직접 몸을 굴리면서 터득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금 조한춘의 장구 가락을 능가할 만한 인물은 이제 좀체로 찾기 어렵다.
조한춘은 굿판에 종사하면서도 환갑 잔치나 절에서 행하는 재(齋)에 불려 다녔다. 삼현육각을 구성해서 이름을 얻게 되었으나, 도당굿판이 급격하게 와해되면서 점차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화랭이들이 점차로 죽으면서 화랭이판이 깨지게 된 것도 도당굿판의 존립을 어렵게 했다. 그러다가 보니 조한춘은 강령탈춤의 악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1980년, 조한춘의 나이 62세에 마당 세실에서 기획한 경기도 도당굿을 통해서 그때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던 수원의 이용우 노인과 경기도 오류동의 조한춘이 만나면서 경기도 도당굿 재현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조한춘이 오랜동안 단골판으로 가지고 있던 지역과 협조가 되어서 정기적인 도당굿이 거행되고, 이용우와 조한춘의 기능을 직접 굿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화랭이들 자신은 물론이고 굿 연구자 및 현지 주민에게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 된 것이다.
1990년에 경기도 도당굿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무녀 오수복과 화랭이 조한춘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무형문화재 지정이 너무 때늦은 감이 있었으니 중요 예능인인 이용우 노인은 1987년에 죽고, 무녀인 서복광(서간난) 역시 사망한 뒤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당시까지 생존한 전태용, 김한국, 정일동, 이영수 등이 조사된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전태용이 그 다음해에 사망해서 우리는 또 한명의 중요한 화랭이를 잃게 되었다.
조한춘은 현재에도 서울시 오류동에 거주하면서 무업을 계속 전수하고 있다. 그런데 무업을 계승할 후보자가 없어서 경기도 도당굿 전승의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고 보아도 잘못이 아니다. 도당굿판의 생활공동체가 소멸되니 화랭이들의 예술공동체가 훼손되고 전승자체의 단절 위기에 이른 셈이다.
참고문헌
◇ 김헌선, 경기도 도당굿 화랭이 이용우(1899-1987)의 구비적 개인사, 구비문학연구 제 1집, 한국구비문학회, 1994
◇ 김열규, 한국의 무속 문화, 박이정, 1998
◇ 서대석, 무가, 한국민속대관 6,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91
◇ 장주근 외, 경기도 도당굿, 무형문화재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90
◇ 장주근·최길성, 경기도지역 무속, 문화재관리국,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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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10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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