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미국식 제국주의][파쇼다사건]제국주의의 이론, 제국주의의 역사, 제국주의의 배경, 제국주의의 효과, 제국주의와 노동운동, 제국주의와 미국식 제국주의, 제국주의의 사례(파쇼다사건)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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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국주의][미국식 제국주의][파쇼다사건]제국주의의 이론, 제국주의의 역사, 제국주의의 배경, 제국주의의 효과, 제국주의와 노동운동, 제국주의와 미국식 제국주의, 제국주의의 사례(파쇼다사건)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제국주의의 이론

Ⅱ. 제국주의의 역사

Ⅲ. 제국주의의 배경

Ⅳ. 제국주의의 효과

Ⅴ. 제국주의와 노동운동

Ⅵ. 제국주의와 미국식 제국주의
1. ‘달러-월스트리트 체제’의 성립
2. 경제적 헤게모니의 회복
3. 정치군사적 헤게모니의 강화
4. 국제기구를 통한 미국 제국주의의 세계 지배
1) IMF
2) WB
3) WTO
4) NATO
5) UN

Ⅶ. 제국주의의 사례(파쇼다사건)

참고문헌

본문내용

경제 블록의 출현을 저지하고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부챗살 모양의 보호령 체제”(hub-and-spokes protectorate system)에 재편입 시켜 미국의 정치군사적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의 일부였다(Gowan, 2003: 17).
5) UN
UN은 흔히 주장되듯이 평화를 바라는 세계 인류의 희망으로부터 탄생한 것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국면에서 주요 제국주의국가들의 협상의 산물이었다. UN을 창설하는 협상을 지배했던 나라는 물론 미국이었다. 미국이 UN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음은 전 UN 사무총장 부트로스 갈리(Boutros-Ghali)가 미국 정부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지 않자, 즉 “세계 제1의 강대국과 협조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나자, 곧 코피 아난(Kofi Annan)으로 갈아 치운 1996년의 에피소드에서 잘 드러난다. 미국은 1991년 걸프 전쟁에서 UN을 이용하여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했다. 소말리아와 보스니아에서 UN은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대량학살과 인종분규를 조장 방관했다. 르완다에서도 UN은 대량학살을 방관하고 그 배후조종자를 보호했다. 이들 경우에서 UN의 개입은 인도주의라는 명분 하에 수행되었지만, 실은 인권이나 국제법이 아니라 미국 제국주의의 계획에 의거한 것이었다(Baxter, 1999).
Ⅶ. 제국주의의 사례(파쇼다사건)
아프리카대륙의 북부 지역은 일찍이 고대 지중해세계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었고 근세에 들어와서는 지리상의 발견 과정에서 동서 해안지대에 약간의 식민지와 무역 거점이 건설되었으나 광대한 내륙지방은 19세기 중엽까지도 미지의 대륙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탐험가 리빙스턴(Livingston)과 미국의 스탠리(Stanley) 등에 의해 내륙지방의 사정이 알려지게 되자 제국주의로 접어든 유럽열강은 앞 다투어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20세기 초까지는 완전히 이를 분할하였다. 공황이 터지자 유럽은 대뜸 아프리카를 주목했다. 기계의 등장으로 노예무역의 소멸과 함께 사라졌던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이제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으로 새롭게 조망된 것이다.
더욱이 아프리카는 산업혁명으로 남아도는 유럽 공산품의 좋은 소비시장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원주민들도 자본주의 생산물을 소비할 수 있을 만큼 ‘부자’였던 것이다. 1816~46년 사이 아프리카에 대한 영국의 면직물 수출은 30배, 1854~80년 사이 영국과 프랑스의 서아프리카에 대한 수출은 2.5배 증가했다. 유럽의 열강들은 더 이상 아프리카의 시장가치를 외면할 수 없었다. 19세기 말 유럽의 선진국들이아프리카로!’를 외친 배경이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 1898년 7월에서 9월까지의 기간 동안에 발발한 파쇼다 사건은 제국주의를 내세운 열강들이 벌이게 될 충돌을 예고한 사건이라 할 만 하다. 당시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 두 강대국이 전쟁 직전까지 감으로써 전쟁보다 덜 극적이지만 오히려 보다 더 심각한 상황을 야기한 사건이었다.
영국 정부는 수에즈 운하를 끼고 있는 이집트의 안전을 위해 나일 강 전체 지역의 통제를 원했고, 나아가 아프리카 남단의 케이프 식민지에서부터 북동쪽의 카이로까지를 모두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종단정책(Cape-to-Cairo Project)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는 서쪽 모로코와 알제리에서부터 동쪽의 커다란 섬 마다가스카르까지에 이르는 지역들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횡단정책(Cape Verde-to-Somaliand Project)을 구상하고 있었다. 파쇼다(Fashoda) 사건은 이러한 두 나라의 이해가 충돌한 사건이었다.
사실 양국은 오래 전부터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서 대립하여 왔다. 프랑스는 영국의 이집트 경영을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으며 이디오피아 문제로 양국은 대립했었다. 영국은 또 벨지움과 교섭하여 콩고의 인접지역을 조차하려고 하였다. 이 조차 계획은 독일, 프랑스의 반대에 봉착하여 무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프랑스는 나일 강 상류에 원정대를 파견하려고 하였다. 영국은 1895년 3월, 이러한 파견을 ‘비우호적인 행동’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11월에 원정대 파견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고, 2년 10개월만인 1898년 7월에 파쇼다에 도착하였고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였다.
한편 영국은 키치너(H.H.Kichner)장군으로 하여금 영국이집트 혼성군을 이끌고 수단을 정복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이디오피아에서 이탈리아가 후퇴하게 되자 나일강 상류를 확보할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9월 19일에 파쇼다에 도착한 키치너는 마르샹(J.B.Marchand)에게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마르샹은 이를 거부하여, 영국, 프랑스 양군이 대치하였기 때문에 문제는 런던과 파리와의 외교 절충에 위임되어, 양국의 여론이 들 끊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당시 드레퓌스(Dreyfus) 사건으로 정치적인 혼란을 겪고 있어서 파쇼다에서 영국과 군사적인 충돌을 감행할 수 없는 처지였다. 결국 델카세 외상은 11월 3일 영국에 양보, 마침내 마르샹의 파쇼다 철수를 승인하였다.
이 사건은 영국,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 충돌의 클라이맥스로서, 이에 의하여 영국은 수단을 지배하고 아프리카 종단 정책에 성공하였으나, 프랑스의 대영 여론의 악화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으며, 이후 러시아프랑스 2국 동맹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층 강화되어 갔다.
파쇼다 사건의 정치적인 해결은 1899년 3월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프랑스는 캉봉을 영국으로 파견하여 나일 강 유역의 모든 프랑스 주장을 포기하기로 하였고 그 대신에 쓸모없는 사하라 지역에 관한 프랑스의 주장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ⅰ. 김윤환·김낙중(1970), 한국노동운동사, 일조각
ⅱ. 김형인, 미국학
ⅲ. 박흥식(1980), 아테네 민주정의 경제적 기반 :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고려대교육대학원
ⅳ. 박지향(1996), 제국주의연구 : 쟁점과 전망, 서울대학교 서양사연구회, 서양사 연구
ⅴ. 박지향, 제국주의, 서울대학교 출판부
ⅵ. 해리슨 M. 라이트(1981),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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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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