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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판소리][판소리 창본][명창][채만식][신재효][안향련][박록주]판소리의 정의, 판소리의 유형, 판소리의 특성, 판소리의 창본, 판소리 채만식, 판소리 작가 신재효, 판소리 명창 안향련, 판소리 명창 박록주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판소리의 정의

Ⅲ. 판소리의 유형
1. 춘향가
2. 흥보가(박타령)
3. 심청가
4. 수궁가(토끼타령, 별주부가)
5. 적벽가(화용도)
6. 옹고집타령
7. 배비장타령
8. 변강쇠타령(가루지기타령, 송장가)
9. 장끼타령
10. 강릉매화타령
11. 무숙이타령(왈자타령)
12. 가짜신선타령

Ⅳ. 판소리의 특성

Ⅴ. 판소리의 창본
1. 자료
2. 창본의 개성
3. 창본의 내용

Ⅵ. 판소리 채만식

Ⅶ. 판소리 작가 신재효

Ⅷ. 판소리 명창 안향련

Ⅸ. 판소리 명창 박록주

참고문헌

본문내용

으로 보인다. 그 후 콜럼비아, 빅타, 오케, 폴리돌, 시에론, 다이헤이 음반 등에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1929년(25세) 초에 김경중(김성수의 부친)의 배려로 남원 주천면의 김정문 문하에서 20여 일 동안 <흥보가>(‘초앞’부터 ‘제비 후리러 나가는데’)와 <심청가> 전바탕을 배웠다. 남원에서 소리를 배우고 돌아 온 3월(음)에 복잡한 집안 문제와 조선극장 지배인인 신아무개와의 애정 문제로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무렵 두서너 해 <봄봄>,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의 집요한 애정공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1930년(26세)에 창립된 조선음률협회(회장 김창환)의 회원으로 각종 명창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해에는 원산 명창대회(1921년, 17세)에서 만난 남백우와 헤어지고, 한성권번 소속으로 있었다. 이듬해에 호남 갑부 우석 김종익과 만났고, 이 무렵을 전후한 시기에 송만갑에게 <적벽가>, 정정렬에게 <춘향가>와 <숙영낭자전>,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배웠다. 1934년 5월 11일에 창립총회를 연 조선성악연구회(이사장 이동백)의 회원으로 각종 명창대회에 참가하여 이름을 날렸다. 한편 각종 창극에 출연하여 창극배우로서도 명성을 얻게 되는데, 1934년에 공연된 창극 <춘향전>의 춘향, <흥보전>의 흥보처 역을 맡아 주연 배우로 열연하였다. 1936년에 연쇄창극 <유충렬전>(6. 8~11, 부민관)에 출연하였고, <심청전>(12. 15~17, 동양극장)의 심청 역을 맡았다. 1937년에는 <숙영낭자전>(2. 26~3.1, 동양극장)의 숙영낭자, <배비장전>(3. 2~5, 동양극장)의 애랑 역을 맡았고, 창작극 <편시춘>(6. 21~25, 동양극장)에 출연하였다. 1938년에는 <토끼타령>(3. 13~17, 동양극장)의 자라 어머니, <옹고집전>(8. 8~12, 동양극장)의 옹고집처, 창작극 <漁村野話>(10. 10~12, 동양극장)의 어부 딸 애랑 역을 맡았다. 이 창극들은 그 후 여러 차례 재공연되었다. 그리고 1939년의 이동백 명창 은퇴기념공연에 참가하였다.
1942년(38세) 7월에는 조선음악협회 산하에 결성된 조선음악단의 일원으로 창립 기념공연 ‘조선음악무용제전’의 창극 <춘향전>과 <숙영낭자전>에 출연하였고, 1944년 6월에 창설된 조선이동창극단의 일원으로 <장화홍련전>(12. 4~8, 제일극장)에 출연하였다. 이 무렵의 박록주가 소리하는 자태를 벽소 이영민은 다음과 같은 한시로 읊었다.
錦幕千燈夜如晝 비단 장막은 온갖 등불로 대낮처럼 밝은데
鸞姿燕態上筵遲 난새와 제비의 자태로 천천히 무대에 오른다
秋星忽散鴻將墮 가을별 흩어지고 기러기 떨어질 듯한 분위기
正是春眉絶唱時 이는 바로 春眉가 絶唱을 할 때로다.
해방 직후 국극사, 조선창극단, 김연수창극단 등 창극단체가 결성되지만 남성 위주로 운영되어 박록주의 역할은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7년(43세)에는 대한국악원이 주최한 ‘제1회 창극제전’(2. 10~17, 국도극장)의 <대춘향전>(2. 10~13)과 <대흥보전>(2. 14~17)에 출연하였다. 당시의 창극단체가 여성을 푸대접하는 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박록주는 1948년(44세) 봄에 박귀희김소희임춘앵정유색임유앵김경희 등 30여명의 여류명창을 규합하여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고, 10월에 <옥중화>(박록주, 행수기생 역)를, 1949년 2월에 김아부 작 <햇님 달님>을 시공관에서 공연하였다.
1950년(46세) 적치하의 서울에 남아 있다가 정남희 등의 월북 강요로 고초를 겪었고, 1.4 후퇴 때 오태석신숙이용배조농옥김세준한농선 등 30여명과 함께 국민방위대에 입대하여 1952년 초까지 <烈女花>(박록주, 導唱)로 군위문공연을 다녔다. 눈병으로 한쪽 눈을 잃게 된 것은 1952년 3월의 일이다. 1953년(49세) 대구에서 강태홍, 박춘흥, 박연자, 박병두, 한영순, 나경애 등 40여명으로 國劇社를 결성하여 <열녀화>로 동부전선에 위문공연을 다녔다. 1955년 두 번째 작품으로 김향 작 <애모랑과 더벅머리>(신마산 극장)를 올렸고, 그 후 <만리장성>, <월하삼경>, <유관순전>, <초생달>, <원앙선>, <한양은 천리원정>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국극사는 보랑국극단으로 개명되기도 했다. 박록주의 유랑극단 생활은 1960년 초 급성폐렴을 얻어 경찰병원에 입원하면서 끝이 났다.
박록주는 1960년(56세)에 박귀희에게 <흥보가>를 가르치면서부터 서울국악예술학교에 나가는 등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로 지정된 것은 1964년 12월 24일이고, 그 후 1973년 11월 5일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로 다시 지정되었다. 국악 발전에 끼친 그간의 공이 인정되어 공로상(1964년)과 문화재공로상(1968년) 등을 수상하였고, 1969년(65세)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가진 은퇴공연을 끝으로 공식적인 무대활동을 마감하였다.
1970년대에 판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판소리보존연구회 초대 이사장을 맡아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는 한편 유파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박록주의 <흥보가>는 박귀희, 김소희, 한애순, 성우향, 조상현, 이옥천, 한농선, 정성숙, 조순애, 박송희, 박초선, 성창순, 정의진 등이 배웠고, <숙영낭자전>은 박초선, 한농선, 조상현, 조순애, 박송희 등이 배웠다. 이들 중에서 박송희와 한농선이 박록주제 <흥보가>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었다. 박록주는 1978년 제자발표회(5. 18)와 고향 선산 공연을 마지막 무대로 1979년 5월 26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면목동의 단칸 셋방에서 영욕으로 점철된 한 많은 소리꾼의 삶을 접었다.
참고문헌
강한영 교주(1981), 신재효 판소리 사설 여섯마당집, 형설춘판사
공연 팜플렛, 판소리 국창 박록주 - 님의 소리를 그리며
김현주(1991), 판소리문학에서 구술성과 기술성의 관련 양상 및 장르적 의미, 판소리연구 제2집, 판소리학회
박록주·박봉술(1981), 창본 흥보가
정병욱(1981), 한국의 판소리, 집문당
채만식(1989), 홍보씨, 채만식 전집 7권, 창작과 비평사
최정선(1989), 판소리의 연행예술적 연구, 원광대 국문과 박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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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0.23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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