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없음
본문내용
화사상에 빠져 그 틀에서 북벌을 주장하고, 그 북벌을 위한 임시적 조치로 지패법이나 호포법 등을 주장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의 ‘기자 존숭’은 조선인을 교화했다는 데서 나아가, 기자를 민족의 시조로 삼으려는 시도로 그의 중화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북벌의 당위성을 떠나 당시 정책의 우선순위에 있어 북벌이 최상위인가? 양란 이후 피폐해진 민생부터 돌봐야 되지 않는가? 과연 윤휴의 북벌이 누구를 위한 북벌인가? 윤휴의 개혁적 정책은 실행하고, 실제 북벌은 안 하는 경우라면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대변통은 없었다.
이런 나의 소견에도 불구하고 윤휴의 죽음은 현재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다양성이 부정되고 어떤 하나의 생각으로 획일화하려는 시도는 항상 그 결말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죽고 죽이는 그런 시대를 돌이켜보며 오늘날 우리는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좌니 우니 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지 다시 한번 돌아볼 때다. 그런 의미에서 윤휴의 이 말은 새겨볼만하다.
"자사(중용의 저자)의 뜻을 주자 혼자만 알고 어찌 나는 혼자 모른다는 말인가?"
이런 나의 소견에도 불구하고 윤휴의 죽음은 현재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다양성이 부정되고 어떤 하나의 생각으로 획일화하려는 시도는 항상 그 결말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죽고 죽이는 그런 시대를 돌이켜보며 오늘날 우리는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좌니 우니 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지 다시 한번 돌아볼 때다. 그런 의미에서 윤휴의 이 말은 새겨볼만하다.
"자사(중용의 저자)의 뜻을 주자 혼자만 알고 어찌 나는 혼자 모른다는 말인가?"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