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읽고(농민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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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읽고(농민의 삶)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1. 농민의 일상과 한해나기

2. 농사를 짓는 법

3. 농민과 두레

4. 농민의 조세 부담

<맺음말>

본문내용

세력들이 자기 잇속을 챙기기 위해 움직일 때마다, 일반 농민들은 기둥 뿌리가 뽑혀나갔던 것이었다.
그럼, 당시 농민층이 부담해야 할 조세 총액은 얼마나 되었을까? 책 내용 중에 박지원의 양인 농민층의 일반적인 생활상을 그린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이 글에서 그는 다섯 명 정도의 노동력과 소 한 마리를 가지고 논과 바트 모두 합쳐 약 1결 2부(약 50마지기) 정도를 경작하는 양인 소작 농민을 예를 들고 있는데, 과중한 지대와 조세 부담 때문에 이 농가는 만성적인 적자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즉 이 정도의 토지에서 연간 피곡(皮穀) 497두를 생산하는데, 지대 250여 두와 전세 72두를 납부하고 49두 7승을 종자용으로 남겨 둘 경우, 이 농가가 1년 동안 사용할 곡식은 128두 정도, 쌀로 계산하면 3석 4두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게다가 군역호나곡과 같은 각종 부세와 땔감의복소금과 같은 생활필수품을 여기에서 충당해야 했으므로 위의 양인 농가는 곧 심각한 적자 상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쉽게 고쳐질 것이 아니었다. 당시 대부분의 농가가 관청으로부터 밀린 조세를 내라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굶주리는 아이들의 등쌀은 야반도주로 농민을 내몰고 있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조세가 토지를 기준으로 산정 할당되는 도결(都結)이라는 형태로 징수되었다. 토지세로의 집약화는 조세제도 내에서 신분적 속성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지배층의 자의적인 수탈 가능성 또한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농민의 납세 부담은 증가 일로에 있었지만 조세제도의 형식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정부는 조선 사회 끝무렵까지 납세자의 권리를 억누르면서 의무만을 강요함으로써 그들의 시대적 책무를 저버리고 말았다.
<맺음말>
농민의 자식들은 출생하여 몇 해가 지나면 또 생산 활동 인구의 일원이 되어 그 부모의 주어진 일생을 꾸려 나갔다. 또 그들이 성장하고 혼인하고 가정을 이루면 다른 구성원의 일부를 이루지만, 아울러 국가의 제한과 구속을 마찬가지로 받았다. 농민의 일생은 고단함의 연속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거나 꿀물이 뚝뚝 떨어지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눈앞에 펼쳐지는 희망에 가득 찬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신분상승이 많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간혹 뉴스를 통해 자수성가한 인물들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법적으로 이런 장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들이 과연 신분 상승 의지는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비록 고려시대의 ‘만적의 난’과 같이 천민 신분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시도는 있었지만 진정으로 신분 타파 운동은 근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조선시대 농민의 일생은 과연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일까? 오늘날 우리의 농촌은 젊은 사람이 떠나 버리고 나이 많은 농부만 남아 논밭을 지키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들은 가진 능력이나 경험에 비해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시대적 배경은 조금 다르지만, 조선시대에는 이와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당시의 노련한 농부는 농사일에 대한 전문가로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국가에서 또는 지방 수령이 농사일에 자문을 구할 때 가장 먼저 찾아가야 할 사람이 바로 늙은 농부였다고 한다. 이런 노련한 농부들은 하루살이와 한해살이를 계획하고 조정하며 집행하는 주체로서 농사일의 중심에 있었다. 노농(老農)을 중심으로 하나의 가족은 내부의 분업 체계를 구성하고 농사일을 중심으로 하루살이와 한해살이를 꾸려갔다. 노농을 중심으로 하여 농부들은 조선시대 역사의 주체로서 그 소임을 다하였던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직업이 다양화 되고, 직업의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식생활과 연관되어 있는 그들을 천시하고 있는 사회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책읽기를 통해 노농의 자취를 어렴풋이나마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역사관련 종사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농부들의 삶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재해석하고 알게 되면 당장 이슈가 되고 있는 한-미 FTA 농업 관련 분야를 물론, 대한민국의 농업 미래를 예측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도서 내 참고자료
「농민이 두레를 만든 까닭」, 이해준
「농사는 어떻게 지었나」, 김건태
「농민의 조세 부담」, 김성우
「농민의 하루살이와 한해살이」, 염정섭

키워드

  • 가격1,8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1.12.19
  • 저작시기2011.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2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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