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토목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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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히 한국전쟁 때에도 별로 큰 전화를 입지 않아 비교적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화서문
화서문(華西門, 보물 403호)은 화성(華城)의 서문이다. 문의 제반 시설과 규모는 동쪽의 창룡(蒼龍)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문을 보호하는 옹성(甕城)도 동문옹성과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문루(門樓)는 홍예문 위에 단층으로 되어 있고 바깥쪽으로 벽돌로 쌓은 평여장(平女墻)이 설치되었다. 문의 안쪽편에는 수문청(守門廳)이 있었고, 문의 바깥쪽은 반원형의 옹성이 있어 굽어 드나들도록 되어 있다. 옹성은 모두 벽돌로 쌓고 현안 3개와 여장에 네모꼴 총혈(銃穴) 19개와 사혈(射穴) 6개가 뚫려 있다. 서북쪽에 있는 공심돈(空心墩)은 화서문과 같이 축조된 2층으로 된 망루(望樓)로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인데 이 같은 망루는 수원성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공심돈은 계단을 따라 위로 오를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하여 총안(銃眼)-포혈(砲穴)이 뚫려 있고, 위에는 단층의 목조누각을 만들어 총안이 뚫린 판문(板門)시설을 하여 원거리 목표물로부터 근거리의 목표물까지 한꺼번에 방어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성벽 아래로 접근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현안(懸眼)이 마련되어 있는 점에서 볼 때 치성(雉城)·적대(敵臺) 등과 기능이 동일하지만 성벽보다 위로 치솟았으므로 독특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축성 계획에 과학성 도입
본래의 화성 축조 계획은 토성으로 건설하는 방안이었다. 석성으로 건설하는 것이 견고성과 수비에서 앞선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경비와 자재 조달의 어려움으로 토성이 낙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획 과정에서 새 수원부의 근처에 질 좋은 화강석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다음에는 석성으로 계획을 수정한다.
그리고 북학파 실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벽돌의 부분적인 사용이 확정되었다. 또한 여러 전란에서의 패배 원인을 분석하여 치성의 적확한 설치, 포루의 설치, 옹성의 설치, 여장의
크기와 넓이 및 높이까지 산출해내게 된다.
수원부를 가로질러 흐르는 버드내에 남수문과 북수문을 내면서 어떻게 하면 시설물이 물의 저항을 견딜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 결과로 버드내 상류에서 북수문과 남수문에 직접 저항을 받는 부분에 마치 배의 머리처럼 앞이 뾰족한 오각 기둥 돌을 시설한다. 이는 과거의 돌다리들에서 볼 수 있었던 사각 기둥을 45도로 돌려 놓는 토목술에서 한단계 더 발전시킨 결과인데 종전의 사각 기둥 형태에서 오각 기둥의 형태로 변모시킨 것이다. 오각 기둥의 뾰족한 부분을 상류로 배치하고 나니 물의 저항은 저항대로 줄일 수 있으면서, 시설물의 안전은 또 안전대로 보장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문루를 자랑하는 장안문과 팔달문의 경우 초대형의 무지개 돌문을 설치하는데 있어서도 정확한 작도와 시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텐데 이를 완벽하게 시설한 점은 과학 건축의 한 측면을 보이는 것이다
기계의 사용으로 인한 공기 단축
거중기의 사용은 어떤 형태로든 화성의 건설에 크게 이바지했을 것이다. 커다랗고 무거운 돌을 적당한 높이까지 들어올린다는 것은 건설의 발전을 의미한다.
다산이 거중기를 고안하게 되는데 영향을 끼쳤던 중국의 \'기기도설\'은 독일인 선교사 요한 테렌스의 저술이었다. 그러나 다산은 기기도설을 보고 참작하였을 뿐 전혀 다른 기계를 만들어냈다. 8개의 도르래를 사용하여 적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어올리는가 하면, 밧줄을 물레에 감아 더욱 큰 힘을 쓰게 했던 것이다.
이는 공기의 단축이라는 과학성도 중요하지만 작업자의 안전도에서도 뛰어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또한 기존의 수레는 바퀴가 커서 짐을 싣거나 내리는데 힘이 많이 들었고 열악한 도로 사정에도 맞지 않아서 작고 튼튼한 바퀴를 가진 유형거를 개발, 현장에서 유용하게 쓰이도록 했다. 녹로나 활차 등의 개발도 화성 성역의 공기를 단축하는데 한 몫을 한다.
벽돌 등 신소재 사용
우리나라에서 벽돌을 사용한 예는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의 제 25대왕인 무녕왕릉이 벽돌로 축조되었고, 무녕왕릉 앞의 6호분 또한 벽돌 무덤이다. 통일신라시대 많이 쌓여진 전탑에서도 벽돌의 사용이 유구함을 알겠다.
그러나 벽돌을 생산하고 시공하는데 있어 적지않은 문제점이 드러나게 된다. 벽돌을 구워내기에 좋은 흙을 구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벽돌 가마의 설치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한 접착제의 개발도 어려운 일이어서 오랜 기간 동안 자주 쓰이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다가 북학파 실학자들이 중국 연경에 사신으로 드나들면서 중국의 주택에 벽돌이 많이 쓰인 것을 보고 오게 되고 연구를 거듭한다.
특히 연암 박지원은 자신이 현감으로 있던 안의현에다 벽돌 가마를 설치하고 직접 벽돌을 구워내 사용하기도 한다. 또 1744년 강화부 유수 김시혁은 강화성을 수축할 때 벽돌을 사용하여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공로로 그는 한성부 판윤에 승진하기까지 하니 벽돌이 매개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몇 년 가지 않아서 수축한 강화 벽돌성이 무너져 내리게 되어 벽돌의 사용에 한계가 있었음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수원의 화성 건설에 이르면 벽돌을 구워내고 사용하는데 자신이 생겨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을 만들어 내는데 일조하게 된다. 벽돌은 잘 구워 시공만 잘하게 되면 석성보다 견고하다. 석성은 적의 중화기로 공격을 당하게 되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폐단이 없지 않으나, 벽돌로 쌓은 성은 같은 파괴력에 의해 손상을 입더라도 직접적으로 충격을 받은 부위만 허물어져 내리고 보수도 용이한 장점이 있다.
그래서 화성의 건축가들은 화성의 시설물과 성벽 중 중요한 부분에는 예외 없이 벽돌을 사용했다. 이 벽돌의 부분적인 사용은 그 효능이 이백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드러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벽돌의 사용은 자재의 규격화와 대량 생산성, 그리고 성벽이나 시설물의 형태에서도 효용이 드러나서 멋들어진 곡선을 구현하는데 있어서도 탁월하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수원화성 홈페이지 www.cosguide 엔싸이버 세계문화탐방 www.encyb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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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24
  • 저작시기2007.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58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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