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 캔버스에 담긴 뭉크의 삶, 표현주의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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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양미술] 캔버스에 담긴 뭉크의 삶, 표현주의의 선구자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뭉크의 탄생과 인생의 전반기

2. 뭉크 인생의 중반기, 그리고 사랑

3. 요양 후 한층 다채로워진 뭉크의 말년기

Ⅲ. 결론

Ⅳ. 참고 문헌

본문내용

견으로까지 번졌다. 뭉크의 고국인 노르웨이는 게르만족의 원형이 잘 보존된 북구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해 있는데, 독일의 일부 비평가들은 이 점을 이용해 프랑스의 인상주의에 맞서 ‘뭉크의 대작들은 게르만 정신의 발현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퍼트리려 했다. 1933년에 나치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괴벨스라는 사람은 나치를 선전하는 일을 담당했다. 괴벨스는 북유럽에 나치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으려 북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뭉크를 전적으로 지지해주었고, 그에게 괴테 메달을 수여하는 등의 아부를 했다.
그렇지만 뭉크는 괴벨스의 나치 선전 전략에 휘둘리는 것을 거부했다. 뭉크의 거부가 이유가 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히틀러와 괴벨스를 비롯한 나치스는 곧 뭉크의 작품이 나치가 원하는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과 ‘나치체제의 강력함’을 선전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괴벨스는 그가 그렇게나 사탕발림을 하던 뭉크의 미술을 경멸했고, 박물관에 걸려있던 뭉크의 그림들을 떼어내 헐값에 팔아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1937년에는 뭉크의 작품들을 타이틀부터 부정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퇴폐미술전’이라는 전시회에 내걸기까지 했다. 소비자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의 호감을 얻으려면 되도록 사람들끼리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나치는 뭉크의 작품에 ‘퇴폐미술’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도 모자라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 방법을 역이용해 사람들이 뭉크의 그림을 보면서 무의식중에 불쾌감을 느끼도록 유도했다. 나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뭉크의 그림을 비롯해서 세잔, 고흐, 고갱,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샤갈, 들로네, 키리코, 앙소르 등 외국 작가의 작품들을 경매를 통해 팔아 버렸고, 나머지는 괴벨스의 단호한 결단 아래 불 태워졌다. 1939년 한 해 동안 무려 1,004점의 유화, 3,825점의 수채화, 소묘, 그래픽 작품들이 불탔다.
뭉크의 마지막 주제, 자기 자신
1940년 4월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해 노르웨이까지 나치의 손에 들어갔다. 자신이 그림이 나치에 의해 불에 타는 것을 경험한 뭉크는 그림 그리기를 주저했다. 뭉크의 미술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독일에서 지냈기 때문인지 노르웨이 사람들은 뭉크가 나치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의심했다. 이렇게 또 한 번 노르웨이에 상처를 받았지만 뭉크는 자신의 재산을 노르웨이에 기증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재산은 1,008점의 회화와 4,443점의 드로잉, 15,391점의 인쇄물, 378점의 석판화 188점의 에칭, 148점의 목판화 석판 143개, 동판 133개와 그가 찍은 사진, 그의 개인 원고와 편지, 출판물 등이 전부였다. 이는 나중에 뭉크 출생 100주년이 되던 해에 세워진 뭉크 박물관이 그렇게나 풍부한 자료를 소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뭉크가 말년을 보내고 있었을 때는 전쟁 중이라 모델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뭉크가 죽기 전 몇 년간 모델 대신 거울을 보며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뭉크가 말년에 그린 자화상 중에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은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 1940>이다. 그림의 왼쪽에 보이는 멈춰버린 시계는 관을 연상케 하고, 오른쪽에 수평으로 커다랗게 놓여있는 침대는 ‘죽음의 침상’으로서 대기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43년부터 뭉크는 오래전부터 앓아왔던 기관지염이 심해져 잠도 이루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서 지냈다. 이 기간 동안 뭉크는 악령이라는 책을 읽고, 계속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1944년 1월,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느껴 마음을 가다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23일에 뭉크는 숨을 거두었다. 뭉크의 장례식마저 나치는 자신들의 선전 무대로 만들어버렸고, 뭉크는 가족들의 묻혀있는 공동묘지에 안치되지 못했다.
Ⅲ. 결론
이야기만 들어도 뭉크는 숨이 턱턱 막힐 만큼 우울하고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을 살았다. 그렇지만 그가 느꼈던 우울과 좌절, 불안과 분노,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느끼고 지나간다. 이러한 감정들을 어떤 이들은 글로, 어떤 이들은 음악으로 풀어낸다. 뭉크의 경우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또 자기 자신도 그림 속에 자신의 아픔을 투영함으로써 위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뭉크의 그림을 보며 우울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뭉크와 그의 그림은 ‘표현주의의 확립’이라는 아주 큰 의미를 지닌다. 뭉크가 살았던 시기는 감정을 드러내는 표현주의는 비주류의 예술이었다.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뭉크가 처음 독일에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실패작이라며 비아냥거린 것도 뭉크의 그림이 당시 일반화 되어 있던 규범화된 양식들과 이질감이 느껴진 탓이다. 표현주의란 현실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삶을 변형되고 왜곡된 형태로 묘사함으로써 강렬한 내적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다. 뭉크의 그림은 모호하고 불안전하게 표현되어, 표현주의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많은 이들의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뭉크는 묵묵히 자신의 그림을 계속 그려나간다. 뭉크가 지인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을 그리지 않고 이미 본 적 있는 것만을 그린다네.”라고 말 했듯이, 뭉크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물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과 환영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 이런 뭉크 그림의 특징은 색채를 통한 감정이입과 선, 형태의 왜곡 등의 실험적인 시도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밑바닥까지 닿아 감동을 준다. 실제로 수차례의 전시회를 통해 이런 뭉크의 그림을 본 미술가들은 그의 그림을 본 따 그림을 그렸고, 그의 화풍을 닮아가려 노력해 표현주의를 더욱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Ⅳ. 참고 문헌
1. <뭉크 뭉크, 에드바르트 뭉크 저, 이충순 역>
2. <현대 예술의 거장 19 - 에드바르 뭉크, 수 프리도 지음, 윤세진 옮김>
3. <에드바르 뭉크, 롤프 스테너센 지음, 김윤혜 옮김>
4. 네이버 오픈캐스트 에드바르 뭉크 편 http://navercast.naver.com/art/theme/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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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1.23
  • 저작시기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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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77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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