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와 찬양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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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통문화와 찬양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전통문화와 찬양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

1. 무신론(無神論) 선전
2. 유물론 선전
3. 전통문화 부정
4.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의 위대함을 선전

본문내용

요구하면서 사생아를 엥겔스의 성을 따서 이름을 지었고 엥겔스는 아이를 한 노동자의 집에 입양시켰다. 말 못할 피해를 입은 엥겔스는 죽기 전에 후두암에 걸려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종이에 다음과 같이 썼다. "프레디(Freddy)는 마르크스의 아들이다. 투시가 그녀의 아버지를 이상화(理想化) 시켰다." 여기서 프레디는 마르크스의 사생아이고 투시는 마르크스의 딸이다. 이 추문은 지금 이미 동부 독일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004년 6월의 『유럽신경학 저널(The European Journal of Neurology)』에서 폭로한 바에 따르면, 3명의 이스라엘 의사들이 역사 자료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레닌은 1917년 10월 혁명을 지도하기 전에 이미 유럽에서 매독에 걸렸으며 이 때문에 1924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참고한 역사자료에는 유럽과 소련에서 레닌을 치료했던 의사의 기록과 레닌의 건강 상황 자료 및 연구자들에게 ‘정치선전’이라고 불리는 검시(檢屍)보고서를 포함한다. 연구자 중 한 사람인 정신과 의사 러너(Vladimir Lerner)는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레닌의 이름을 없애고, 그 증상을 전염병에 대해 잘 아는 신경학자에게 보여준다면 그는 ‘매독’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 레닌에 대한 진단결과 : 매독
ⓒ 대기원
중공 당원들은 문화대혁명 이전에는 마치 모두 금욕주의자인 것 같았지만 마오쩌둥만 해도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부인만 셋이나 된다. 마오쩌둥은 양카이후이(楊開慧)가 죽지도 않았는데 허쯔전(賀子珍)에게 장가를 갔고, 허쯔전과 이혼도 하기 전에 바로 장칭(江靑)에게 새장가를 들었다. 1994년, 마오쩌둥 신변에서 22년간 근무했던 리즈쑤이(李志綏)는 『마오쩌둥 주치의 회고록』이란 책에서 마오쩌둥의 방탕하고 문란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폭로했다. 책에서는 마오는 ‘언제나 여자를 노리개로 삼았다’라고 했으며, 많은 아름답고 젊은 여자들을 입궁시켜 ‘마치 식탁에 요리를 올리듯이 번갈아 가며 여자를 진상했다’고 언급했다.
마오쩌둥의 경호원은 마오가 대기근 기간에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인민들과 고생을 같이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대기근은 이미 1959년에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오는 후난(湖南)성 위원회 서기 장핑화(張平化)에게 적수동(滴水洞) 행궁(行宮)을 건축하라고 지시했으며 이를 ‘203공정’이라고 불렀다. 1960년 하반기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962년까지, 총 건축면적 3638.62평방미터에 달하는 1, 2, 3호의 주 공사와 더불어 소산(韶山)에서 적수동까지 연결 도로를 동시에 준공하는데, 총 1억 위안을 소비했다. 만약 이 돈으로 식량을 구입했다면 후난성에서 대기근 3년 동안 적어도 150만 명이 굶어 죽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공산당 지도자의 방탕한 생활은 무절제한 욕망에 따른 방종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권모술수와 냉혹함 그리고 거만하고 사치스러우며 음란하고 안일한 생활은 신앙의 단속, 도덕의 단속, 매스컴의 감시가 없었기 때문에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게 했으며 그 결과는 극도의 재난(災難)성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저속하고 타락한 품성이 일으킨 시범 작용은 사회도덕을 급속히 아래로 끌어내렸다.
‘조신(造神 신격화)’은 개인 독재의 기초가 되었다. 왜냐하면 신은 잘못을 범할 수 없기 때문에 공산당 지도자 역시 자연적으로 진리의 화신으로 가장해야 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오직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일언당(一言堂)’을 합리화했고 한 사람의 두뇌로 수억의 두뇌를 대신함으로써 재난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바로 시정할 방법이 없었다. 독립적인 사고는 위험한 일로 되어 버렸는데, 왜냐하면 중공이 싫어하는 그런 결론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세를 따르고 흐름 등에 따를 뿐 자신의 인생에서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했다. 모든 문제는 오로지 중공의 의지대로 움직이거나 조직에서 결정하기만 기다렸다.
▲ 중공에 의해 신으로 떠받들어진 마오쩌둥
ⓒ 대기원
조신’의 또 다른 결과는 바로 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박해를 받을 때 여전히 ‘조직을 믿고 당을 믿는다’는 것이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박해를 받을 때 마음속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며 신의 공정함에 희망을 기탁할 수 있다. 하지만 무신론자는 박해 받을 때 그들은 더 높은 도덕권위를 찾을 수 없기에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된다. 이때 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당) 중앙은 좋으니, 조직에서 명확히 해결할 거야’라고 말한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이런 것도 중공이 자신을 신격화한 결과이다.
유신론자는 곤경에 처했을 때 기도를 하거나 심지어 사찰이나 도관(道觀)에 가서 향을 피우며 소원을 빌 수 있다. 무신론자는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으면 조직을 찾아가는데’ 당(黨)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오히려 당(黨)이야말로 문제를 만들어낸 진정한 장본인임을 모르고 있다.
중공은 정권을 탈취한 초기에 즉시 매체와 교육을 농단하였다. ‘일언당(一言堂)’의 방식으로 ‘무신론’ 과 ‘유물론’을 주입했으며, 전통신앙에 대해서는 단속, 왜곡, 탄압을 진행했으며,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사상개조를 진행에 왔고,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여러 방면에서 먹칠하면서 ‘봉건(封建)’, ‘미신(迷信)’이라고 폄하하며 모조리 무너뜨렸다. 폭력기계를 지휘하여 당(黨)문화를 받아들이길 원하지 않는 출가인과 지식인들을 소멸해 버리거나 혹은 생활 내원을 단절시키는 방식으로 협박하여 굴복하게 만들었다. 또 개인을 숭배하는 ‘조신’ 행동을 통해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빈 공간을 채웠다. 중공의 안중에서 어떤 문화를 인정하는 것은 결코 학술문제나 혹은 단순한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이자 계급적 입장의 문제이다. 문화대혁명 후기에 이르러서는 당(黨)문화가 마침내 단련되고 성숙되어 중공이 희망하는 정도로 전통문화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듯이 신세대는 모두 당문화의 교육에서 자라나 정통(正統) 문화와 관념에 대해서는 무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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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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