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역사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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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있었으나 소련의 전차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었다.
1955년 9월 Adenauer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이것은 실질적인 동방정책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또한 같은 해 서독은 NATO에 가입하였다.
1957년 서독은 본격적인 경제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1961년 8. 13. 1960년말 서독으로 넘어간 동독주민의 수가 300만에 달하자 소련의 후루시초프는 동서베를린을 가르는 베를린 장벽을 세운다.
1962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Bonn을 방문, 독-프의 화해분위기가 시작된다.
1963년 Kennedy 서베를린 방문 "Ich bin ein Berliner"라고 외치며 베를린주민들을 안심시킨다.
7월 Erhardt는 경직된 동서국가들의 긴장을 완화하고자 Hallstein-Doktrin을 폐기.
1965년 서유럽경제공동체, 서유럽석탄철강공동체 설립하고 회원국이 됨. 이스라엘과 외교관계 수립.
1966년 Kurt Georg Kiesinger (1966-1969 재임)가 수상에 취임. 외무장관에 Willy Brandt가 임명된다.
1967년 루마니아와, 1968년에는 유교와 재수교를 한다.
1968년 CDU 는 SPD 와 대연정을 하는 과정에서 민심을 잃게 되고 이에 항거하는 민중들의 시위가 시작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68 운동"이다.
1969년 SPD의 Willy Brandt (1969-1974 재임)가 수상에 취임하고 본격적인 신동방정책이 시작된다. 그는 이전 정부의 기본입장이던 "서독만이 독일의 유일한 국가다" 라는 입장을 철회하고 동독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우는 등 동서관계의 긴장완화에 주력하였다. 이때부터 동서독간의 왕래가 활성화된다.
1970년 3월 19일 Brandt는 동독 지역인 Erfurt에서 동독총리 Willy Stoph를 만나고 두 달 후인 5월에는 Stoph가 서독의 Kassel에 와서 다시 만난다. 같은 해 8월에는 소련에 가서 회담하였고, 12월 Brandt는 폴랜드를 방문하여
1. Oder-NeiBe 선은 폴랜드의 서쪽 국경이다.
2. 무력 사용을 금지한다.
3. 양쪽 대사 교환 및 모든 관계를 개선한다.
는 조약을 체결한다.
1972년 12월 양독은 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양독의 국경선 인정 2. 통치권은 각자 국가에 한해서만 적용된다.
3. 상주대표부를 교환 4. 독일 내 통상의 지속적 유지
5. 양국의 UN 회원국 가입신청
1974년 Brandt가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수상직을 포기, 수상에는 Helmut Schmidt (1974-1982 재임) 가 취임하였다.
1978년 Berlin-Hamburg 간 고속도로 신설.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35억 DM 지원
1981년 Schmidt는 동독을 방문하여 동독국가수반인 Erich Honecker를 만났다.
1982년 10월 CDU의 Helmut Kohl (1982-1998 재임)이 수상에 취임하였다.
1983년 서베를린 시장으로는 최초로 Richard von Weizs cker가 동베를린에 가서 Honecker를 만남. 1984년 35,000여명의 동독주민들이 서독으로의 입국을 신청하였고 동독정부의 기반은 점점 흔들리기 시작한다.
1986년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이 제네바에서 만나 국비축소를 하고 냉전체제는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1988년 동베를린에서는 공산정권에 반대한 시위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약 120명이 체포되고 그들의 석방을 위한 예배에 약 2000여명이 참석하였다.
1989년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국경을 열자 헝가리에 휴가를 가있던수많은 동독주민들은 오스트리아를 통해 바르샤바나 프라하에 있는 서독 대사관으로 몰려들어 서독으로의 입국을 요청한다. 같은 해 동독창립 40주년 기념식에서 고르바초프가 "동독은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언급하였다. 같은 해 10월 Leipzig에서 거대 시위가 있었고 ("Wir sind das Volk") 이후 월요일마다 집회 계속. 11월 SED 중앙위원회에서 Honecker를 축출하고 Egen Krenz를 후임으로 임명하나 시위가 계속되자 Krenz도 물러나고 공산당 정치국도 물러난다. 실질적으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고 이에 서독정부는 재빠르게 동독지원 계획을 발표한다.
Zehn Punkte Plan
1. 긴급지원정책
2. 환경보호영역을 동독까지 확충
3. 전화시설확충
4. 철도시설확충
5. 동독헌법개정, 새로운 선거법을 만들겠다
6. 동독에서도 시장경제를 따르도록 하겠다
7. 공공기관을 만들어 동독총리와 "계약공동체"를 만들어 해 나가겠다
8. 자유선거를 통하여 양독은 연방으 현태를 구성한다
9. 그리고 난 후 독일을 통일한다
10. 독일통일은 우럽연합체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성명을 발표하자 SPD측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지만 결국은 본질적으로 동의된다.
1989년 12월 Brandenburger Tor 가 열렸다.
1990년 1월 15일 Leipzig에서 데모가 이어졌고 그들은 "Wir sind ein Volk" 라는 구호를 외쳤다.
독일 통일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주변국가들에서 다시 독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런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독일 정부는,
1. 독일통일이 되도 지금의 국경선은 절대로 변함이 없다.
2. NATO 구조를 구 동독지역에까지 확장하지 않는다.
3. 통일로 인한 전략적 잇점으로 독일의 군병력을 단축하겠다.
라고 천명한다.
1990년 3월 동독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되었고 8월 31일 양독은 역사적인 통일조약에 서명하였다.
9월 12일에는 양독 +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간의 협정인 일명 "2+4회의"가 있었다.
1. 동독과 연방공화국 및 Berlin 영토에서 통일된 독일을 설립할 것을 확인한다.
2. 독일의 대외국경은 변경 불가능하다.
3. 폴란드와 후속조약을 맺어 영토상의 불가침성과 주권상호존중을 약속한다.
1990년 10월 3일 동독이 서독에 편입이 되어 독일은 역사적인 민족의 재통일을 이룬다.
  • 가격3,000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5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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