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성령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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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요한의 성령론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특별한 언어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요한 복음안에는 세상안으로 왔으나 몰이해로 인해 공격받고 하늘로 돌어간 인자 (인자)개념이 형성되어 있다.예수의 낯섬은 이 세상의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동시에 예수는 그의 권위로서 세상을 심판했다. 요한복음서에는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거절당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요한복음 안에서 예수의 낯섬은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이 반발을 본 예수는 다시 그 자신을 입증하고자 논쟁했다. 이 논쟁의 바탕에는 예수 자신이 신비였다는 전제가 있었다. 요한공동체는 그들의 복음에 대한 세상의 거부에 직면해 있었고, 요한 복음은 이러한 공동체에 신앙의 근거가 되는 예수 인식과 이 인식을 가능케 하는 성령의 역할을 제시했다. 구원의 준거는 예수인식이며 이 인식은 예수의 지상사역 이후에도 성령에 의해 계속된다.
2 장에서는 믿음과 지식의 연관이라는 광의적 문맥을 보이고자 한다. 3장에서는 요한공동체와 요한복음의 독특한 일면을 서술한 뒤, 보혜사 성령의 역할을 요한복음 14 : 15 -17 .26 주석을 통해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결론적으로 예수 인식은 전적인 낯선 타자로서의 성령이 나라는 주체에 임함으로써, 나의 인식이 성령안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예수 인식에 있어서의 주관과 객관은 성령에 의해 전 인격안에서 경험된다. 성령에 의한 예수 인식은 인간의 이성적 한계안에서 이루어지는 동시에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절대적 낯섬의 경험이다. 이 "경험"은 공동체의 압도당함인 동시에 공동체의 응답이다. 따라서 요한 공동체의 역사적 삶의 정황에서 성령의 역할은 공동체의 구원 확신을 강화시켰다. 요한 복음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전승을 그들의 사회적 상황안에서 체험적 신앙으로 변화시켰으며 이 신앙의 기반에는 성령의 역할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 있었다. 즉 예수 인식에 있어서의 성령의 적극적 역할이다.

마태복음 11:27 및 그 병행구에 따르면 예수는 자기가 무제한적인 권한 위임과 하나님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전제 조건으로 주장하였다.

내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은 하나님과 인간 존재 사이의 쌍방적인 인식형태를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관계및 인식이 구원의 때를 위해 준비되었음을 언급한다. 요한에게 구약에 관한 인식은 하나님 편에서는 택함이었고, 예수 또는 인간 편에서는 인식과 인정이었다(참조. 요 5:19, 20a). 이 용어들은 본질적인 연합을 표현하기 위해 요한의 기독론에서 사용되었다.

요한 공동체의 성령이해
요한 공동체의 상황
현대의 비평가들 사이에서 명백히 인정되는 것은 저자인 '사랑하는 제자'가 익명의 인물이고, 독특한 전승에 의존하여 그가 요한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그 전승을 수정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요한 복음 11장 48절에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라는 언급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요한 복음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파괴 이후의 저작으로 추정될 수 있다. 요한 복음은 긴 담론 형식의 설교가 전승된 자료들이었다. 또한 주후 1 세기 경이 되어서야 현재의 본문을 이루었다. 주후 90년 경의 요한 공동체의 상황에는 유대교회와의 대립이 있었다. 요한 복음 본문에도 회당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3회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9:22; 12:42; 16:2). 유대인들은 랍비중심의 회당제도를 건설하는데 기독교가 방해물이 된다고 생각했다. 유대교의 박해와 추방에 대해 요한 공동체도 상당한 반발을 하였다. 유대교에 대한 대립의식은 복음서 곳곳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의 권위의 상징인 모세의 지위가 격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1:17; 3:13; 5:20; 6:46; 7:16 참조). 요한복음서가 쓰여진 주후 90-100 년경에는 교회가 점차 공교회로서 제도적/교권적으로 일정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제도교회가 자신의 교권을 점차 확립하는 동안,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점차 희미해지고 제도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신화화된 예수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었다. 요한 복음을 만든 요한 공동체에는 교회의 제도화 과정에서 밀려났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주후 1세기말 교회가 안고 있었던 과제는 재림의 지연을 해명하는 것과 그리스도교적 종말론 문제, 교회의 제도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본문내용

정말 전적으로 낯선 인격일까 ? 인간은 다만 성령에 압도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 ?' 하고 다시 적었다. 여기에서 인식론과 연결된 '인식대상으로서의 성령과 인식작용으로서의 성령을 어떻게 연결하는가 ?' 하는 문장을 낙서했다. 세번째 강의에서는 인식론이 사물의 본질 (물 자체)에 접근하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말씀을 들었었다. 나는 '낯선 곳에서 오는 하나님의 영과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선천성'이라고 다시 낙서 했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영을 인식하고 결단하여 행동한다. 그 때 나는 기독교 신앙이 일종의 환원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세번째 강의 필기에는 '선험적 능력 = 하나님께 부여받은 것이라고 고백함 : 본질을 직관함 = 성령의 빛안에서라고 고백함'이라는 낙서가 덧붙여져 있다. 나는 인간 인식의 자율성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 인식의 자주성을 하나님 영과의 관련성속에서 해명하기 위한 과정이 이 연구 과정이다. '낯선 분'이 '나'의 슬픔과 기쁨을 헤아리시고 인도하시는 과정을 체험 뿐만이 아닌 언어로도 표현하고 싶었다. 정말 알고 싶었다. 여기까지는 즐거웠다. 이어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끌린다는 이유로' 특정 철학 사상을 도구로 삼기로 했다. 하지만, 김 희성 교수님께 처음 연구 주제를 들고 갔을 때, 나는 그다지 긍정적인 말씀을 듣지 못했다. 교수님의 연구 방법론과 내가 생각한 방법론은 상당한 거리가 있었고, 이러한 거리를 절실히 깨닫기까지는 두달이 넘는 거룩한 시간 낭비(?)가 필요했었다. 더구나, Husserl의 언어는 성령과 마찬가지로 낯섬 그 자체였다. 길을 잃은 듯한 절박한 심정에 어지러웠다. 한 시간 정도 정신에 채찍질을 하면서 읽고 나면 넘긴 책장은 채 두장이 되질 않았다. 나는 분명히 사유의 흐름을 분석해 내는 그의 사상을 성령의 인식과도 연결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언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러한 분석에 이르려면 얼마나 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지난 학기에는 이 상훈, 김 희성, 노 세영, 조 태연, 이 신건 교수님께 배우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하루하루가 살아가는 중인지, 죽어가는 중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주요 내용을 구상할 무렵, '현대 신약학의 동향' 강의를 들으면서 성서 신학적 접근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방법론은 조직 신학적 접근이었고, 먼 옛날 요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성령이 내주하시는 능력이 인간의 어떤 본질과 연관되는가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성령론'은 분명히 성서신학의 강의였다 ! 그제서야 교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저 내 방식대로 요한 공동체가 말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정신없이 성경 주석을 했다. 결국, 비교적 일찍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론'시험 보기 한 시간전까지 헬라어 인용구에 점을 찍다가 제출했다. 교수님께서 ' 안녕 ? ' 하셨는데, 순간 ' 어... 별로 안녕하지 못해요.'하는 너무 솔직한 대답이 튀어 나왔다. '(웃으시면서) 아니 ! 안녕하지 못하다고 ? ' 나는 즉시 뉘우치면서 다시 '어...' 하고 재빨리 물러나왔다. 이어서 시험을 보고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쓰면서) 나오는 길에 퇴근하시는 교수님과 마주쳤다. 같은 방향으로 전철을 탔다. ' 그 논문, 너무 양이 많아.' ' 저... 아주 고통스러웠어요.' ' 음. 고통스럽게 쓴 것 같아.' ' 그래도 나중에 사정없이 비평해 주세요.' ' 음. '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올 무렵, 교수님께서는 연필및 말씀으로 이러저러한 논평을 해주셨다. 그리고 몇주 지난 후에 ' 기억하고 있나 ? '하고 물으셨다. 나는 대답하면서도 다시 식은땀을 흘렸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과연 정당하게 Husserl의 사상을 이해하고 사용했는지, 요한 공동체의 상황과 연결지울 수 있는 사상이었는지 다시 물으셨다. 그리고 성서신학적 방법론에서 요구하는 보다 엄밀한 주석과 저자 요한이 의도하는 바를 정확히 분석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론의 정당성과 그 창의적 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증거를 성서에서 많이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 연구가 아직도, 자아가 보라의 자아인지, 요한 공동체의 자아인지, 복음서 저자의 자아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령이 단순히 인식과 지각에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및 행동까지도 포용하신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논지가 과연 정당한가도 거듭 질문해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연구기간 동안, 주위의 귀한 조언을 들으면서 Husserl에 있어서 길 잃는 정도를 조금씩 줄여 나갔다. 손에 잡히지도 않을 진리가 과연 인식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가장 근원적이다. 가끔, 무의미한 짓을 하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 한참씩 멍해지고 그랬다. 이러한 무의미성에 대한 도전의식이 지난 학기의 경험에서 얻은 귀중한 교훈이다. 선택한 방법론에 의해, 한 신학도 안에서 Husserl의 사상은 그 독특성을 변형시켜서 성령을 표현할 수 있는 매개가 되었다. 동시에 조직신학과 성서신학의 단절성과 연속성, 철학과 신학의 단절성과 연속성이 날카롭게 안에서 충돌했었다. 전존재로 경험한 그 '멍해질 정도'의 충격과 기쁨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분명한 사실은 '성령론' 강의와 관련하여 좌충우돌 하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김 희성 교수님과 함께 이 윤일 교수님을 생각한다. Husserl을 선택하기까지 철학에 대한 감수성을 지키고 가꿀 수 있도록 많은 영향을 주셨다. 나는 그분에게 91, 92년에 걸쳐 '논리학'과 '현대철학'을 배웠다. 교수님께서는 철학적 사유의 기쁨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언제나 당당하셨다. 그 강의들을 떠올리면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 때 처음으로 강의를 통해 날아오르는 법을 배웠다. 행복했다. 이런 만남이 계속되었던 4년 동안, 행복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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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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