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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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에 대한 문제 의식

니부어는 “개인은 도덕적이고, 사회는 비도덕적이다.”고 주장한다. 개인들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존중하면서 행동하기 때문에 도덕적인데, 집단과 사회를 이룰 때, 이기적 요소들은 강화되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회학자나 교육가들이 합리적 이성과 종교적 선의지(善意志)로 사회와 집단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자연과학의 빠른 발전을 사회과학이 분발하여 발전한다면 적정한 도덕 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하여 집단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회학자와 교육자의 주장에 반대한다.

집단이 빚는 갈등의 원인은 경제적 이익이기 때문에 집단은 약탈적 이기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사회적 상황에서 인간은 이해관계의 노예이기 때문에 대화와 협력을 통한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집단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배계층에 대항하는 집단의 힘으로 맞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갈등이 정의를 획득하는 과정이라면, 서로 경쟁하는 집단들 사이에서 자신의 집단의 이익을 교의화(강령화)하고, 강자의 힘에 맞서 충분한 힘을 획득하여, 지배계급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은 도덕적이다. 그러나 집단은 비도덕적이다.’ 만약 개인이 이성적 판단으로 남의 이익을 고려하여 행동한다면, 그러한 개인 하나하나가 모여 이룬 다수나 집단은 대체로 남의 이익을 고려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개인은 선하나 집단은 이기적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퇴니에스가 주장한 대로 전통적 사회 유형인 ‘게마인샤프트(혈연, 지연, 민족 공동체)’에서 현대 사회 유형인 ‘게젤샤프트(계약사회, 이익집단)’으로 전환되어 집단 이기주의가 일반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의 주장은 결과와 원인 사이 상반된 비약의 주장을 하고 있으며, 논리적 전제에 대한 해명 없는 현상에 대한 주장일 뿐이다. 즉 이기적 집단이 많다고 하여, 개인은 남을 배려하는 선의지가 있는데, 선의지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집단을 이루면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필자의 주장과 반대로 오히려 개인의 이기심을 제어하기 위한 집단이나, 결사를 만들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현재에도 경제, 환경, 문화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민참여 운동은 ‘합리적 사회 세력’이라 말할 수 있다.

집단들 사이에 이해관계 때문에 사회적 이해관계의 충돌은 불가피하다고 한다. 만약 개인이 선하고 합리적이라 한다면, 이러한 개인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결사는 선의지를 실천할 수 있다. 흑인들의 권리를 위해 백인들이 단체를 이룰 수 있고, 여성의 권리를 위해, 남성들이 단체를 이루어 여성단체와 함께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할 수 있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노사의 갈등 문제도 경제적 이득을 함께한다는 공동이익 때문에 폭력 아닌 대화와 협력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 집단과 집단의 문제가 반드시 강자(사용자)의 힘에 맞서 대항하는 약자의 힘(노동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갈등이 힘과 힘의 대결로 폭력사태가 빚어져, 기업존망이 위태로워진다면, 경영자를 대표하는 단체나, 노동자를 대표하는 단체는 보다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자각하고 집단의 이기심을 버리려 할 것이다.

필자의 주장대로 힘의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사회적 불균형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을 수도 있다. 남녀의 평등 문제, 인종차별의 폐지, 사회적 약자를 먼저 배려하는 복지제도의 확립 등은 정의를 이루기 위한 인간의 합리적 이성의 진보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집단을 이루어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집단에 숨겨 드러낼 수 있으나, 시간이 진행될수록 사회적 성찰을 통하여 집단의 그릇된 욕망을 시정할 수도 있다. 안면도, 부안에선 핵폐기물 사태는 집단이기주의의 극심한 갈등을 드러냈으나, 합리적 여론수렴과정을 통하여 다른 지역에서는 평화적인 주민의사결정으로 핵 폐기장을 유치했다. 대화와 협력, 여론수렴의 의사결정과정은 집단의 사고도 성장시킬 수 있는 예라 할 수 있다.

가치 있는 삶에 대하여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고 말한 밀의 말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인간의 쾌락이 물질로만 이루어질 수 없을 뿐더러 가치 있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 준다. 우리는 빵만으로 살 수 없다. 그러나 빵 없는 행복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그래서 인간은 물질을 추구하여 물질의 결핍에서 비롯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자료1은 우리의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여전히 30-40대 젊은 세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자료2에서는 80년대 이후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60-70년대를 거치면서 산업화를 통해 삶의 물질적 여건이 개선되는 것과 비례하여 이혼율은 증가하고 있다. 아울러 50대 이후 노년층이 많아져 가치 있는 삶을 설계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가치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고통과 쾌락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부와 명예, 권력의 증대가 행복이요 쾌락이라 생각한다면, 부와 명예와 권력의 결여는 고통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부와 명예와 권력이 아닌 다른 가치를 발견하고자 힘써 왔다. 부와 명예와 권력의 결핍이 주는 고통을 인내하며 또 다른 가치를 통해 자기완성을 꿈꾸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동물과 달리 쾌락 아닌 고통을 통해 또 다른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고 이런 노력은 인간의 고귀함을 더욱 살려 준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이성을 잘 활용하면 훌륭한 인간, 행복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 모두가 디오게네스처럼 물질적 조건 없이 이성적 사유만으로 자유로울 수 는 없다. 맹자도 일반적인 백성은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즉 물질적 만족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곳간이 차야 인심이 나고 곳간이 비면 인심의 틈이 난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맹자는 그러나 항신 없이도 항심이 있을 수 있는 존재를 ‘선비’라 예외를 두었다. 그러므로 이성적 훈련을 쌓으면 어느 정도 물질적 결여를 참아낼 수 있다고 말한 셈이다.

본문내용

정에서 맛보아야 하는 쾌락의 일종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분명 가치 있는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배부른 돼지는 배고픈 돼지보다 낫다. 문제는 배부른 소크라테스와 배고픈 소크라테스 중 인간 욕망은 배부른 소크라테스에 기울어 있다. 배고픔이 성찰하는 삶의 계기를 준다면, 배부름 때문에 그런 기회를 박탈당하는 배부름보다는 낫다. 그러나 배고픔으로 생을 유지할 수 있다면 성찰의 기회도 가뭇없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안연은 한 그릇의 밥과 물에 만족할 줄 알았다. 그래서 공자도 그를 가난함에도 배우기를 좋아하고 자기 수양에 힘쓴 그를 추켜세웠다. 그러나 그는 단명해 버렸다. 한 그릇의 밥과 물이 더 있었다면 공자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보여 주었을지 모른다. 공자 스스로 ‘하나를 들어 둘을 알 수 있다’는 자신과 달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던’ 안연이 아닌가? 우리는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물질의 노예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꾸릴 최소한의 물질은 있어야 자신의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물질에 치여 그런 기회마저 상실한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성찰의 삶을 돌볼 최소한의 물질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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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95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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