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 론
I. 아우구스티누스의『신국론』의 성격과 집필 배경
1. 『신국론』의 집필 배경
2. 『신국론』의 문화철학적 시각
II. 『신국론』의 정치철학
1. 사회적 존재의 명암
2. 아우구스티누스의 국민(國民) 개념
3. 평화는 정의의 열매
III. 두 도성의 원리 : 사사로운 사랑과 사회적 사랑
1. `하느님 사랑'과 `자기 사랑'
2. `사사로운 사랑'과 `사회적인 사랑'
결 론
I. 아우구스티누스의『신국론』의 성격과 집필 배경
1. 『신국론』의 집필 배경
2. 『신국론』의 문화철학적 시각
II. 『신국론』의 정치철학
1. 사회적 존재의 명암
2. 아우구스티누스의 국민(國民) 개념
3. 평화는 정의의 열매
III. 두 도성의 원리 : 사사로운 사랑과 사회적 사랑
1. `하느님 사랑'과 `자기 사랑'
2. `사사로운 사랑'과 `사회적인 사랑'
결 론
본문내용
성공을 거둘지라도 인간 조건의
현세적 차원을 극복하지 못하는데서 그치거나, 하느님 사랑(amor Dei)으로 전향함으로
써 지상의 단결을 하느님 도성의 신비적 단결에 합치시킴으로써 정치의 차원을 초월하
고 지상적 성공을 상대화하는 경지에 이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는
그 자체로는 구원되지 못하고 정치를 초월하는 다른 무엇에 의해서 구원된다. 따라서
신앙인은 정치가들과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바빌론의 지상 평화라도 보전
되도록 힘써야만 한다(19.26).
하지만 `사회적 사랑'이 하느님 도성을 구성하는 본질이라면 공동 행복이 그 나라
의 완결과 종국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19.5). 성도들만이 이루는
사회야말로 더없이 완전하고 사랑에 찬 이상 사회이리라(In Io.Ev. 67.2). 아우구스티
누스는 완결된 하느님 도성의 이념을 다음과 같이 셋 또는 넷으로 꼽는다: "진리를 군
주로, 사랑을 법도로, 영원을 척도로 두는 사회야말로 완전 사회이다."[33] 그 이유는
"천상 도성에서는 진리가 승리자요 거룩함이 품위가 되고 평화가 행복이요 생명은 곧
영원"(ubi victoria veritas, ubi dignitas sanctitas, ubi pax felicitas, ubi vita
aeternitas: 2.29.2)이기 때문이다. 이상 사회의 이 목표를 향해서 하느님 도성은 지
상의 순례를 하고 있다.
앞서 논한 것처럼 평화야말로 두 도성에서는 물론이려니와 하느님 도성에서도 정치
적인 이상이다. 질서가 없으면 그 화친은 집단이기주의의 강도떼요, 화친이 없으면 질
서라는 것이 감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면, 화친이야말로 인간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
고 집을 이루며 도성을 이룬다. 19권에서 각종 평화를 논구한 다음 "하느님 안에서 향
유하고 하느님 안에서 서로 향유하는 이들의 질서바르고 화친하는 사회"(19.13.1)를
제시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윤리의 토대인 사용과 향유(uti et frui), 하느님은 향유하고 인간
들은 하느님 안에서 서로 향유한다는 원리가 <신국론>에서는 하느님 도성의 사회적 공
동체적 차원을 현저하게 부각시킨다. 이것은 다양성 안에 단일성을 창출할 줄 아는 사
랑을 통해서 구현된다. 그때는 또 그때만 사랑이 완전무결한 사회적 사랑이 될 것이요,
참 영광, 참 영예, 참 평화, 참 자유가 모두에게와 각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시는 하느님의 영원과 진리와 사랑을 모두 참여하고 향유하는 까닭
이다(22.30.1-3).
"하느님이 사랑이시므로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각자가 갖고 있는 것들이 만인에게
공통된 무엇이 된다. 사람은 자기가 지니지 못했을 지라도 남에게서 그것을 사랑한다
면 자기가 지닌 셈이다. 입은 영광이 다양하다고 해서 아무런 질시도 없을 것이니 만
인 안에서 통치를 이룩하는 것이 다름 아닌 사랑의 단일성이기 때문이다."[34]
결 론
『신국론』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 사상을 간추린다면 은총
에 의한 정치생활의 구원을 그가 일관되게 암시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므로 정치라는 것을 떠나서 지상의 순례길을 통과할 수는 없다. 이것은
지상의 나라를 통과하든 하느님 나라에 도달하든 간에 그 길이 다름아닌 `사회적 사랑
'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의 초역사적 여정을 안전에 두고 있는 그로서는 정치가 안고 있는 근원
적인 결핍과 그에 대한 대안을 추구해야만 하였다. 지상적 공동선에 대한 사랑, 그 성
원들 간의 합의되고 질서잡힌 평화, 제도적인 통일이 정치를 이루고 정치가 존재하는
조건을 이룬다. 여기서 "평화는 정의의 열매(opus iustitiae pax)"라고 하는 그리스도
교 정치철학의 요체가 나온다. 정의를 구현하려는 신앙인들의 부단하고 과감한 노력과
투신이 있다면, 평화와 정의에 대한 이 위대한 교부의 사랑에서 영감을 길어내는 것으
로 간주할 만하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정치를 상대적이고 부분적인 무엇으로 만들며 물질적이고 현
세적인 공동선(共同善)이라는 것이 결코 인간들을 궁극적으로 만족시켜 주지 못함을
깨우쳐 주며, 인간들로 하여금 그 이상의 것으로 전향할 여지를 만들어낸다. 아울러
정치 그 자체가 인류의 단절된 부분이요 분열시키는 요소임을 깨닫게 한다. 정치는 그
것을 존재케 하는 조건 자체가 불화와 투쟁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자체만으로는 또
자율적으로는 개인과 인류의 궁극적 최고선을 실현하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불가
능하고
무력함을 드러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그리스도교 국가라고 할지라도 정치가 완
전한 국가의 건설을 이룩하리라는 희망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치를 사탄의 통치
로 보는 비관론도 배척한다. 정치는 인간 본성에서 유래하므로 제거될 수는 없으나 현
재의 인간 조건에서 정치의 고유한 수단 방법만을 갖고서는 완전한 치유책이 또한 없
다. 정치 공동체를 이루는 성원들의 부단한 정화와 회심에 의해서만 정치에 내재하는
모순과 갈등과 아포리아들이 해결의 전망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
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 투신 속에서도 언제나 사회 조건 전체에 종말론적
단서(但書)를 붙이는 여유를 갖는다.
그 구성원들의 인간적 회심은 "우리의 모든 정의가 향하여 유지되는 목표"(propter
verum boni finem ad quem refertur: 19.27)를 염두에 두고서 행동하게 만들며, 그렇
게 되려면 이미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사랑으로 변모되는 전환을 거쳐서, 천상 도성에
서나 만끽할 수 있는 평화로운 행복(pax beatitudinis, beatitudo pacis)을 희구하기
에 이른다. 그리스도인 시민이든 그리스도인 황제든 하느님 도성을 향하는 순례 중에
이처럼 온전한 정의를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내심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요 은총이 역사에 미치고 있다는 표시이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지성을 비추는 구원의 빛 속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서 정치를 관찰하면서 하느님 도
성을 바라보도록 인류의 시선을 돌려 준다.
현세적 차원을 극복하지 못하는데서 그치거나, 하느님 사랑(amor Dei)으로 전향함으로
써 지상의 단결을 하느님 도성의 신비적 단결에 합치시킴으로써 정치의 차원을 초월하
고 지상적 성공을 상대화하는 경지에 이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는
그 자체로는 구원되지 못하고 정치를 초월하는 다른 무엇에 의해서 구원된다. 따라서
신앙인은 정치가들과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바빌론의 지상 평화라도 보전
되도록 힘써야만 한다(19.26).
하지만 `사회적 사랑'이 하느님 도성을 구성하는 본질이라면 공동 행복이 그 나라
의 완결과 종국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19.5). 성도들만이 이루는
사회야말로 더없이 완전하고 사랑에 찬 이상 사회이리라(In Io.Ev. 67.2). 아우구스티
누스는 완결된 하느님 도성의 이념을 다음과 같이 셋 또는 넷으로 꼽는다: "진리를 군
주로, 사랑을 법도로, 영원을 척도로 두는 사회야말로 완전 사회이다."[33] 그 이유는
"천상 도성에서는 진리가 승리자요 거룩함이 품위가 되고 평화가 행복이요 생명은 곧
영원"(ubi victoria veritas, ubi dignitas sanctitas, ubi pax felicitas, ubi vita
aeternitas: 2.29.2)이기 때문이다. 이상 사회의 이 목표를 향해서 하느님 도성은 지
상의 순례를 하고 있다.
앞서 논한 것처럼 평화야말로 두 도성에서는 물론이려니와 하느님 도성에서도 정치
적인 이상이다. 질서가 없으면 그 화친은 집단이기주의의 강도떼요, 화친이 없으면 질
서라는 것이 감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면, 화친이야말로 인간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
고 집을 이루며 도성을 이룬다. 19권에서 각종 평화를 논구한 다음 "하느님 안에서 향
유하고 하느님 안에서 서로 향유하는 이들의 질서바르고 화친하는 사회"(19.13.1)를
제시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윤리의 토대인 사용과 향유(uti et frui), 하느님은 향유하고 인간
들은 하느님 안에서 서로 향유한다는 원리가 <신국론>에서는 하느님 도성의 사회적 공
동체적 차원을 현저하게 부각시킨다. 이것은 다양성 안에 단일성을 창출할 줄 아는 사
랑을 통해서 구현된다. 그때는 또 그때만 사랑이 완전무결한 사회적 사랑이 될 것이요,
참 영광, 참 영예, 참 평화, 참 자유가 모두에게와 각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시는 하느님의 영원과 진리와 사랑을 모두 참여하고 향유하는 까닭
이다(22.30.1-3).
"하느님이 사랑이시므로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각자가 갖고 있는 것들이 만인에게
공통된 무엇이 된다. 사람은 자기가 지니지 못했을 지라도 남에게서 그것을 사랑한다
면 자기가 지닌 셈이다. 입은 영광이 다양하다고 해서 아무런 질시도 없을 것이니 만
인 안에서 통치를 이룩하는 것이 다름 아닌 사랑의 단일성이기 때문이다."[34]
결 론
『신국론』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 사상을 간추린다면 은총
에 의한 정치생활의 구원을 그가 일관되게 암시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므로 정치라는 것을 떠나서 지상의 순례길을 통과할 수는 없다. 이것은
지상의 나라를 통과하든 하느님 나라에 도달하든 간에 그 길이 다름아닌 `사회적 사랑
'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의 초역사적 여정을 안전에 두고 있는 그로서는 정치가 안고 있는 근원
적인 결핍과 그에 대한 대안을 추구해야만 하였다. 지상적 공동선에 대한 사랑, 그 성
원들 간의 합의되고 질서잡힌 평화, 제도적인 통일이 정치를 이루고 정치가 존재하는
조건을 이룬다. 여기서 "평화는 정의의 열매(opus iustitiae pax)"라고 하는 그리스도
교 정치철학의 요체가 나온다. 정의를 구현하려는 신앙인들의 부단하고 과감한 노력과
투신이 있다면, 평화와 정의에 대한 이 위대한 교부의 사랑에서 영감을 길어내는 것으
로 간주할 만하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정치를 상대적이고 부분적인 무엇으로 만들며 물질적이고 현
세적인 공동선(共同善)이라는 것이 결코 인간들을 궁극적으로 만족시켜 주지 못함을
깨우쳐 주며, 인간들로 하여금 그 이상의 것으로 전향할 여지를 만들어낸다. 아울러
정치 그 자체가 인류의 단절된 부분이요 분열시키는 요소임을 깨닫게 한다. 정치는 그
것을 존재케 하는 조건 자체가 불화와 투쟁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자체만으로는 또
자율적으로는 개인과 인류의 궁극적 최고선을 실현하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불가
능하고
무력함을 드러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그리스도교 국가라고 할지라도 정치가 완
전한 국가의 건설을 이룩하리라는 희망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치를 사탄의 통치
로 보는 비관론도 배척한다. 정치는 인간 본성에서 유래하므로 제거될 수는 없으나 현
재의 인간 조건에서 정치의 고유한 수단 방법만을 갖고서는 완전한 치유책이 또한 없
다. 정치 공동체를 이루는 성원들의 부단한 정화와 회심에 의해서만 정치에 내재하는
모순과 갈등과 아포리아들이 해결의 전망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
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 투신 속에서도 언제나 사회 조건 전체에 종말론적
단서(但書)를 붙이는 여유를 갖는다.
그 구성원들의 인간적 회심은 "우리의 모든 정의가 향하여 유지되는 목표"(propter
verum boni finem ad quem refertur: 19.27)를 염두에 두고서 행동하게 만들며, 그렇
게 되려면 이미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사랑으로 변모되는 전환을 거쳐서, 천상 도성에
서나 만끽할 수 있는 평화로운 행복(pax beatitudinis, beatitudo pacis)을 희구하기
에 이른다. 그리스도인 시민이든 그리스도인 황제든 하느님 도성을 향하는 순례 중에
이처럼 온전한 정의를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내심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요 은총이 역사에 미치고 있다는 표시이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지성을 비추는 구원의 빛 속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서 정치를 관찰하면서 하느님 도
성을 바라보도록 인류의 시선을 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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