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흘린발자취 J.M 캐롤 지음 말씀보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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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피흘린발자취 J.M 캐롤 지음 말씀보존학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피흘린발자취 J.M 캐롤 지음 말씀보존학회
감상문 4p
요약 4p~38p

본문내용

한 의문을 조금 생각해 보는 것도 그릇된 일은 아닐 것이다. 사실 침례교도들이 그러한 기회를 가져 본 일이 있었던가?
한 때 네덜란드의 국왕이(그 당시 네덜란드는 노르웨이, 스웨덴, 벨기에, 홀랜드 및 덴마크를 포함한 나라였다.) 국교가 있어야 하겠다는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을 하였다는 것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가? 당시 이 왕국은 국가교회를 가지고 있었던 국가와 정부에 의하여 사방이 둘러싸여 있었다. 즉 그러한 종교는 정부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었다. 그 홀랜드의 국왕은 한 위원회를 지정하여 당시 존재하고 있었던 모든 교회들과 교파들의 주의 주장을 조사하여 어느 것이 신약성경적인 교회로서 가장 올바른 주의주장을 가지고 있는가를 조사하게 하였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 위원회는 침례교회가 신약의 가르침에 합당한 대표적인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국왕은 침례교회를 그 왕국의 국가교회 또는 교파로 만들 것을 제의하였다. 침례교도들은 그에게 진심으로 사의를 표하였다. 그러나 그 제안은 그들의 근본적인 교리와 확신에 배치되는 것이라 말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의 교회가 한 국민의 국가교회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아니었다. 확실히 그들은 로드 아일랜드의 식민지가 지정되었을 때에도 그러한 기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교파를 박해한다는 것 - 그것은 아마 그들이 침례교도로 존속하고 있는 한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원래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로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신앙의 근본신조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교회와 국가의 결합이라는 문제에 대한 침례교들의 확신은 대단히 견고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언제나 국가에서 제안한 모든 원조를 다 거절하였다. 여기서 두 가지 실례만을 들어보기로 하자.
그 하나는 텍사스에서 또 하나는 멕시코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오래 전 베일러 대학교가 발족하였던 바로 그 당시 텍사스 주(州)에서 원조를 제안하여 왔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참한 곤경에 빠져 있었지만 그 원조를 거절하였다. 바로 그 당시에는 텍사스의 감리교회는 빈약한 학교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국가의 원조를 받았던 것이다. 결국 그 학교는 국가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멕시코에서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W.D. 파우웰이 멕시코에서 침례교회의 선교사로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의 선교사업은 코아윌라 주의 총독 마데로에게 침례교회에 대한 대단히 좋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마데로는 만약 침례교회가 멕시코의 코아윌라 주의 훌륭한 학교를 설립하기를 원한다면 국가에서 상당한 원조를 하겠노라고 제의하였다. 파우웰은 이 일을 선교부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 기금은 국가에서의 원조라는 이유로 거절하고 말았다. 후에 마데로는 개인적으로 막대한 금액을 기증하였다. 그 기금을 받아서 마데로 학원을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 후기
1. 암흑시대의 기간에도 카톨릭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리고 독립된 여러 교회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사도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교회들도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카톨릭과 그 교리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배척하였던 것이다. 이는 믿을 만한 역사가 밝히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2.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잔악하고 무서운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역사가 나타내는 바에 의하면 AD 426년부터 시작되었던 약 12세기 동안의 암흑시대에 무릇 5천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자의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암흑시대 이전과 이후에도 수십만 명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잔악한 박해의 손길 아래 죽어갔던 것이다.
3.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던 이 암흑시대를 통하여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던 것인 바 그러한 명칭은 다 그들의 적들이 그들에게 준 것이었다. 이러한 명칭은 때로는 특히 뛰어난 어떤 영웅적인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또는 다른 이유에 따라 붙여진 것이며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던 같은 사람들이 각각 그 지방의 이름에 따라 다르게 불렸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변천해 가는 여러 가지 명칭 중에서도 전 암흑시대를 통하여 적어도 어떤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떨어지지 아니하였던 이름 즉 명칭이 있었으니 이것이 곧 아나-밥티스트(Ana-Baptist)였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던 이 합성어는 제 3세기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곧 유아세례가 생긴 직후의 사실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며 더욱더 암시적인 사실은 카톨릭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이전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밥티스트라는 명칭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인들 무리의 이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4.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뛰어난 특징은 이어진 세기에도 한결같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유아세례라는 인위적인 교리를 부인하고 유아 때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도 또 그것이 침수례의 침례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들어올 때는 재침례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 특징으로 인하여 그들이 아나-밥티스트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5. 이 특수한 명칭은 여러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합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도나티스트, 폴리시안, 알비겐시스 그리고 고대의 왈덴시스와 그 외의 사람들에게 꼭 알맞는 명칭이었다. 그 후의 세기에는 이 명칭이 한 특수한 무리들에게 적용된 보편적인 이름으로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만 아나-밥티스트라 불리게 되었고 다른 모든 명칭은 차츰 없어지게 되었다. 바로 16세기의 초엽에 모든 개신교 교회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나타났던 루터교회가 생기기 이전에 아나라는 말이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단순히 밥티스트라 불렸던 것이다.
6. 암흑시대에 들어가서도 어떠한 점에 있어서나 카톨릭과 동일시할 수 없었던 많은 교회들의 무리가 있었다. 다음에 소개되는 것은 암흑시대에 들어갔을 때에 그들이 지켰던 몇 가지의 기본적인 교리들이며 암흑시대를 지나서도 그들이 고수하였던 몇 가지의 기본적인 교리들이고 또한 오늘날에도 그들이 굳게 지키고 있는 몇 가지의 기본적인 교리들이다.
  • 가격3,000
  • 페이지수38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08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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