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은 악녀인가? 정쟁의 희생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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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붕당정치로부터 환국정치

Ⅲ. 왕실 권위의 추락

Ⅳ. 장희빈에 대한 상반된 평가
 1. 악녀설
 2) 희생양설

Ⅴ. 맺음말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래 고(告)하였다.” 『숙종실록』권35, 숙종27년 9월 23일(정미) 첫 번째 기사
신당의 존재가 1699년부터 존재하였다면숙빈 최씨를 비롯한 궁인 전원은 물론숙종또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자학을 신봉하는 조선 사회에서 무속 행위는 국법으로 엄중히 금하였지만 궁 밖은 물론 궁 안에서도 자주 행해졌고, 숙종의 모후명성왕후 김씨도인현왕후와 함께 숙종의 두창의 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하였던 만큼 장씨의 신당 설치 자체는 굳이 문제 삼을 사안이 아니었다.
또한 다른 역적의 옥사와 달리 숙종이 직접 적발한 일이었다. 대신들은 어린 세자를 생각해 더 신중하게 논의하자고 했으나, 숙종의 입장은 강경했다. 장희빈을 모시던 궁녀들은 모진 고문에 실토를 했다. 그런데 숙종이 어떻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일을 알았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물증을 찾아낸 것도 후의 일이었다. 숙종은 “실로 나라를 위하여 세자를 위하는 일이니 장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라.” 장희빈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덧붙였다. “희빈을 살려 둔다면 후일 뜻을 얻어 안팎으로 자신의 당파를 심은 뒤에 국가의 근심이 될 것이다.” 장희빈이 다시 세력을 넓혀서 정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숙종의 결정은 자신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위해 한 여인을 희생시킨 지극히 정치적인 결단이었다. 또한 숙종의 정치적인 것뿐만 아니라 노론의 자의적인 해석이 지금까지도 악녀의 대명사로 그려지고 있다.
“지난번에 비망기가 이미 너무나 놀랍고 두려웠는데 마침내 이러한 처분이 있었고, 외조에서 알지 못하는데 깊은 밤에 갑자기 이러한 거조(擧措)가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형정(刑政)은 비록 작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홀로 독단(獨斷)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이런 일이겠습니까? 전하의 성명으로서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숙종실록』권35, 숙종27년 9월 25일(기유) 다섯 번째 기사
위의 사료를 보면 다분히 숙종의 정치적인 계산 하에 장희빈이 비운하게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비망기도 문제였지만, 숙종이 단독으로 옥사를 일으킨 것은 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이와 같이 파란을 일으키는 옥사를 놓고 숙종은 정황 증거만을 제시했을 뿐 물증은 없었다. 숙종은 장희빈을 시중하던 궁녀들을 추궁했지만 숙종이 말한 흉측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숙종이 다분히 정치적 의도 하에 행해졌던 것으로 장희빈은 정쟁의 희생양으로 비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렇듯 숙종이 등을 돌리고, 정치적 맞수였던 노론의 편파적인 논리에 따라 정쟁의 희생양이 되었고, 『조선왕조실록』은 집권정당의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편찬한 것이고 관찬 사서로서의 한계와 집필자의 자의석인 해석이 깊게 반영되어있다. 『인현왕후전』 또한 노론의 자의적인 해석에 깊게 관여됨으로써 장희빈을 악녀로 서술하여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경향이 깊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즉 장희빈은 정치적 틈바구니 속에서 숨을 거둔 비운의 여성이었다.
Ⅴ. 맺음말
장희빈은 악녀인가? 정쟁의 희생양인가? 라는 논쟁은 끊임없이 제기 되고 있다. 기존의 노론이 장희빈에 대해서 서술한 책인 『숙종실록』, 『인현왕후전』, 『연려실기술』등 많은 기록에서 악인으로 그려졌다.
실록에서 전하는 내용이 모두 사실적으로 그려질까라는 의문점을 가질 수 있다. 실록은 관찬 사서로서 정치적 주도권을 가진 세력이 편찬했다. 편찬자의 시각에서 필요한 내용을 취사선택하고, 편찬자의 눈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드라마, 영화 등에서 실록을 인용했다고 해서 그것을 사실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록을 만든 사람들의 정치적 의도보다는 거기에 닮긴 속뜻을 읽어야 제대로 된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인현왕후전』에서는 인현왕후의 덕행을 묘사하기 위해 장희빈의 악행을 낱낱이 밝히고, 서인 특히 노론의 눈으로만 장희빈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악인으로 악녀의 상징 요부의 대명사로 오늘날까지 누명을 쓴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부정적인 평가로 그려지고 있다.
장희빈이 살았던 숙종 조는 병자호란과 예송논쟁으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질 때로 떨어진 시기이고 숙종이 즉위한 후에는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이 벌어지는 붕당과 탕평의 사이에 있는 이른바 ‘환국’의 시기였던 정치적 격동기였다. 또한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여 경제가 성장한 시기였다.
이렇듯 장희빈은 정치적·경제적 격동의 시대를 살다가 죽었다. 장희빈은 삶 자체는 스펙터클 자체였다. 중전의 자리를 놓고 인현왕후와 대립하였으며, 남인과 연대하여 서인과 갈등을 쌓았다. 한때 역관의 딸에서 왕후라는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만, 당시 신분사회의 한계에 맞서, 끝내 정쟁의 희생양으로 죽었다. 국왕과 신료, 남인과 서인의 틈바구니 속에서 외줄에 매달린 채 위태로웠던 그녀는 정쟁으로 흥하고 정쟁으로 망한 비운의 여성이었다.
참 고 문 헌
Ⅰ. 사료
1.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2. 인현왕후전
Ⅱ. 논문
1. 홍순민, 「장희빈을 위한 변명」 『역사비평』 14 역사문제연구소 1991.
2. 신복룡, 『한국사 새로보기』 「당쟁은 식민지 사학의 희생양」 2001.
3. 김아네스, 「장희빈, 악녀의 누명을 쓴 정치의 희생양」 『내일을 여는 역사』 23 내일
을 여는 역사 2006.
4. 강광식, 「붕당정치와 조선조 유교정치체제의 지배구조 변동양상 : 지배연합의 변동양상 분 석을 중심으로」『OUGHTOPIA 24』경희대학교 인류사회재건연구원 2009.
Ⅲ. 단행본
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0 :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8.
2. 지두환, 『장희빈』 역사문화 2002.
3. 정두희외, 『장희빈, 사극의 배반』 소나무 2004.
4.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2004.
5. 김아네스, 「장희빈, 악녀의 누명을 쓴 정치의 희생양」 『내일을 여는 역사』 23 내일 을 여는 역사 2006.
6.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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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1.19
  • 저작시기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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