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농사와 농사직설
Ⅲ. 농사와 벼농사
Ⅳ. 농사와 쌀
Ⅴ. 농사와 청동기시대
Ⅵ. 농사와 이앙법
참고문헌
Ⅱ. 농사와 농사직설
Ⅲ. 농사와 벼농사
Ⅳ. 농사와 쌀
Ⅴ. 농사와 청동기시대
Ⅵ. 농사와 이앙법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유구도 쌀밥을 먹는 풍조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음을 지적할 정도였다. 이는 밭을 논으로 만드는 ‘번답(反畓)’을 새로운 풍조로 크게 유행시켰다. 정부는 재해를 이유로 번답을 금하는 소극책에만 주목하였고, 생산의 불확실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리시설’의 확충은 근대적인 토목기술이 미비한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이앙법은 시대에 따라 그 성격이 질적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특히 넓은 개간지와 부족한 노동력 때문에 신흥지주층에 의해 보급이 추진되던 17세기의 그것과 주로 토지생산성을 높여 소농경제 안정화에 기여하려던 18세기 중반이후의 그것은 매우 다른 내용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종래의 전통적인 벼농사법인 직파법과 건경법도 크게 발전하였다. 이제 직파법은 골짜기 논(洞畓)과 같은 특수한 곳에서만 재배되었는데, 여기에도 제초를 쉽게 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들이 등장하였다. 한편, 가뭄을 견딜 수 있는 특수한 기술인 건경은 이제 한반도의 중부 및 서북부 지방으로 집중되어졌다. 이미 이에 맞는 품종이 등장하고, 노동력을 절감하기 위한 특수한 농구들이 고안되어 축력일관 작업이 행하여졌다. 이제 이앙법의 발전과 더불어 직파법도 이러한 직파법도 건답재배에 이르러 세계에서 유일한 독자적인 기술체계로 확립되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후기의 이앙법 확산은 적지 않은 사회문제를 야기하였다. 이앙법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농민들은 대규모 영농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이제 농민층 분해는 크게 확대되어 갔다. 또한 이 시대 농업생산에 있어 ‘벼농사 의존도’가 높아지자, 주기적인 자연재해로 인한 생산의 불확실성은 점차 심각한 기근과 재해를 3-4년마다 야기하여 심지어 한 해에 100만 명까지 사망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벼농사의 발전은 제한된 토지면적에도 불구하고, 17-18세기에는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3%를 넘는 급격한 인구증가를 초래하였다. 조선초기에 비해 거의 2배 이상 증가한 인구는 1550년에 농지 1ha당 2.19인에 불과하던 인구밀도를 1825년에는 3.68인으로 크게 높였다. 더구나 이러한 인구집중은 삼남지방의 경우 무려 4.68인의 수준에까지 달하였다. 결국 인구의 증가는 좁은 농지를 보다 노동 투입으로 최대한 이용하는 집약적인 소농들을 양산하였다. 특히 이러한 새로운 벼농사는 밭작물의 경우와는 달리 단위면적당 노동투입을 급속도로 높여 토지생산성을 크게 높이는 것으로 발달하였다. 그로 인한 벼농사의 발달은 곧 시장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소농들의 생활을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주제를 강화하는 대신 전통적인 신분제를 붕괴시키는 작용을 가하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증대된 사회적 유동성은 19세기로 갈수록 더욱 격심하였는데, 이는 곧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진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시대에 확립된 소농들의 근면성(industrious revolution)은 이후 높은 교육열과 결합되어 서구로부터 이식된 공업화와 자본주의의 정착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는 곧 농민들의 사회의식 성장을 의미하며, 이는 곧 특유의 농경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김영진(2001), 조선후기 이앙법의 확산과 수리시설에 대한 재검토, 인하대학교
▷ 김상태(2000), 농사직설과 조선 초기의 농업 실태, 인하대학교
▷ 김윤희 외 1명(2009),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두산그룹
▷ 이춘녕(1972), 농사직설해제, 농촌진흥청
▷ 안인찬(2000), 한국 벼농사의 추세와 전망, 한국농업정책학회
▷ 임효재(2001), 한국 선사시대의 농사 : 쌀 농사를 중심으로,1, 한국농어촌공사
이처럼 조선후기의 이앙법은 시대에 따라 그 성격이 질적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특히 넓은 개간지와 부족한 노동력 때문에 신흥지주층에 의해 보급이 추진되던 17세기의 그것과 주로 토지생산성을 높여 소농경제 안정화에 기여하려던 18세기 중반이후의 그것은 매우 다른 내용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종래의 전통적인 벼농사법인 직파법과 건경법도 크게 발전하였다. 이제 직파법은 골짜기 논(洞畓)과 같은 특수한 곳에서만 재배되었는데, 여기에도 제초를 쉽게 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들이 등장하였다. 한편, 가뭄을 견딜 수 있는 특수한 기술인 건경은 이제 한반도의 중부 및 서북부 지방으로 집중되어졌다. 이미 이에 맞는 품종이 등장하고, 노동력을 절감하기 위한 특수한 농구들이 고안되어 축력일관 작업이 행하여졌다. 이제 이앙법의 발전과 더불어 직파법도 이러한 직파법도 건답재배에 이르러 세계에서 유일한 독자적인 기술체계로 확립되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후기의 이앙법 확산은 적지 않은 사회문제를 야기하였다. 이앙법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농민들은 대규모 영농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이제 농민층 분해는 크게 확대되어 갔다. 또한 이 시대 농업생산에 있어 ‘벼농사 의존도’가 높아지자, 주기적인 자연재해로 인한 생산의 불확실성은 점차 심각한 기근과 재해를 3-4년마다 야기하여 심지어 한 해에 100만 명까지 사망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벼농사의 발전은 제한된 토지면적에도 불구하고, 17-18세기에는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3%를 넘는 급격한 인구증가를 초래하였다. 조선초기에 비해 거의 2배 이상 증가한 인구는 1550년에 농지 1ha당 2.19인에 불과하던 인구밀도를 1825년에는 3.68인으로 크게 높였다. 더구나 이러한 인구집중은 삼남지방의 경우 무려 4.68인의 수준에까지 달하였다. 결국 인구의 증가는 좁은 농지를 보다 노동 투입으로 최대한 이용하는 집약적인 소농들을 양산하였다. 특히 이러한 새로운 벼농사는 밭작물의 경우와는 달리 단위면적당 노동투입을 급속도로 높여 토지생산성을 크게 높이는 것으로 발달하였다. 그로 인한 벼농사의 발달은 곧 시장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소농들의 생활을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주제를 강화하는 대신 전통적인 신분제를 붕괴시키는 작용을 가하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증대된 사회적 유동성은 19세기로 갈수록 더욱 격심하였는데, 이는 곧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진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시대에 확립된 소농들의 근면성(industrious revolution)은 이후 높은 교육열과 결합되어 서구로부터 이식된 공업화와 자본주의의 정착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는 곧 농민들의 사회의식 성장을 의미하며, 이는 곧 특유의 농경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김영진(2001), 조선후기 이앙법의 확산과 수리시설에 대한 재검토, 인하대학교
▷ 김상태(2000), 농사직설과 조선 초기의 농업 실태, 인하대학교
▷ 김윤희 외 1명(2009),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두산그룹
▷ 이춘녕(1972), 농사직설해제, 농촌진흥청
▷ 안인찬(2000), 한국 벼농사의 추세와 전망, 한국농업정책학회
▷ 임효재(2001), 한국 선사시대의 농사 : 쌀 농사를 중심으로,1, 한국농어촌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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