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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내선일체, 내선일체 방법, 내선일체 방향전환, 내선일체 기능확대, 내선일체 조선인참여]내선일체의 방법, 내선일체의 방향전환, 내선일체의 기능확대, 내선일체의 조선인참여 분석(내선일체, 내선일체 방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내선일체의 방법

Ⅲ. 내선일체의 방향전환

Ⅳ. 내선일체의 기능확대

Ⅴ. 내선일체의 조선인참여

참고문헌

본문내용

면, “내선일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반도 2천 3백만 국민이 실로 폐하의 赤子가 되는 일이며, 그것은 동시에 일본이 가지고 있는 세계적 이상의 실천자가 되는 일”이었다. 식민지조선인이 진정으로 國體를 내면화 할 때, 진정한 내선일체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결국 녹기연맹에서 주장하는 내세일체란 “사실상 언제까지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일제의 일방적인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으로서 그 기준은 식민지조선인의 國體=皇道의 내면화 정도에 달려있는 “무한한 충성의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식민지조선인의 완전한 일본화이며, 민족적인 것의 철저한 말살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 내선일체에는 ‘일본이 가지고 있는 세계적 이상의 실천’이 전제되고 있다. 즉 내선일체는 “반도만의 시설과 노력에 기대는 작은 범위에 의해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당시의 내선일체론은 일본과 조선의 관계만을 대상으로 하는 측면과 식민지조선을 포함하는 일본과 만주, 중국 등의 관계를 대상으로 하는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의 내선일체론 속에는 식민지조선인들이 ‘일본의 세계적 이상’ 즉 대륙침략을 자신들의 임무로 받아들어야 한다는 기능이 부가되고 있는 것이다.
Ⅴ. 내선일체의 조선인참여
1937년 조선인 내선일체론자 玄永燮의 등장은, 녹기연맹의 운동에서 획기적인 轉機가 되었다. 아나키즘운동으로부터 전향한 그의 문제제기를 통해 녹기연맹 내부에서는 內鮮一體의 논의가 선구적으로 시작되었고, 이것은 쯔다 카타시(津田剛)가 주도권을 장악하며 연맹의 활동이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정치에 접근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여 진행되었다.
1937년 7월, 中日戰爭의 발발을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內鮮一體를 구호로 내걸며 조선인측의 인적물적 전쟁협력을 이끌어 내려 하였다. 그러나 동원의 이데올로기로서 내세워진 만큼, 內鮮一體論은 그 구체적인 槪念定義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저 당위적인 구호로서 외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혼란상황에서, 內鮮一體論의 구체화를 통해 이것을 생명력 있는 사회적 담론으로 살려낸 것이, 일찍부터 선도적으로 내선일체론을 논의해 왔던 녹기연맹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은 그때까지 혼란스럽게 진행되어 온 內鮮一體의 논의에서 理論的 定立을 시도하는 한편, 그 구체적인 실천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1939년 11월에 출간된 今日의 朝鮮問題講座는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비로소 內鮮一體論은 공허한 구호의 차원에서 벗어나, 나름의 내적 논리와 구체성을 갖춘 이데올로기로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전시체제하의 각종 단체와 운동에 중추적 활동가를 공급하였다는 측면이다. 玄永燮, 李泳根 등은 조선인으로서 대표적인 ‘전투적 내선일체론자’로서 활동했으며, 女性界의 대표적 名士로서 ‘가정으로부터의 皇民化’를 주도했던 쯔다 세쯔코(津田節子), 문화예술계 재편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쯔다 카타시, 國民總力朝鮮聯盟와 같은 단체에서 선전활동을 수행했던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등, 조선사회 재편의 중요한 지점에는 녹기연맹의 활동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녹기연맹이 내선일체운동에 전면적으로 매진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조선인 참가자의 확대였다. 1938년을 기점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조선인 회원은, 1940년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 1943년경에는 수적으로 일본인 회원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경향은 내선일체운동을 통해 일종의 정치활동을 행하고자 했던 조선인들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조선인 참가자들은 녹기연맹의 조직 내에서나마 민족차별을 벗어난 인격체로서의 대우를 경험할 수 있었다.
조선인 참가자들은 단순히 ‘앞잡이’가 아니었다. 녹기연맹의 방향전환을 이끌어 내었던 조선인 내선일체론자 玄永燮 이후로, 많은 조선인 회원들이 내선일체론의 구체화, 특히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구체적 실천방안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 스스로가, 조선인으로서의 생활경험에 기초하고 있었기에, 일본인측에서는 생각해 낼 수 없었던 구체적인 실천방안의 제시가 가능했던 것이다.
녹기연맹의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은 식민지시대 말기 조선 지식인들의 轉向論理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단기적으로는 민족운동의 퇴조, 滿洲事變 中日戰爭 등을 통해 드러나는 일본의 현실적인 힘,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블록화의 경향을 보면서 조선독립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이 같은 정세판단 아래서 이들이 취한 길은, 조선인으로서 자기존재의 철저한 부정과 제국으로의 동화를 통해 일본민족으로 편입하는 것, 이를 통해 민족적 차별로부터 영구적으로 벗어나는 것이었다.
지적정서적 차원에서는 조선민족성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일본문화일본정신의 체득이 요구되었고, 실천적 차원에서는 일본인으로부터 동일한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었다. 일본측이 내세웠던 一視同仁이나 八紘一宇의 이념에 근거하여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 시각의 교정을 요구하는 한편으로, 물적인적 전쟁동원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의무수행에 수반되는 권리의 획득을 기대하였다. 보다 장기적인 차원에서는 創氏改名, ‘國語’常用, 內鮮結婚 등을 통해 차별의 근거가 되는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존재 자체를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새로운 민족공동체, 즉 ‘新日本民族’의 형성을 지향했으며, 이것은 ‘차별로부터의 탈출’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무대로 팽창해 가는 일본의 힘에 편승하여, 스스로를 지배민족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길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노성환(2008), 내선일체에 이용된 한일신화, 대한일어일문학회
우치다쥰 외 1명(2008),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정창석(1999), 내선일체 논리의 양상, 한국일본학회
정창석(2011), 황민화와 내선일체로 본 친일문학의 양상, 한국일본문화학회
진영복(2011), 재만조선인의 내선일체 담론과 균열 : 이석훈의 일본어 소설을 중심으로, 한민족어문학회
최윤수(2005), 내선일체와 탈식민주의, 청계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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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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