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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배, 인종주의, 노동운동, 개화운동, 조합교회]일본제국주의와 식민지배, 일본제국주의와 인종주의, 일본제국주의와 노동운동, 일본제국주의와 개화운동, 일본제국주의와 조합교회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지배

Ⅲ. 일본제국주의와 인종주의

Ⅳ. 일본제국주의와 노동운동

Ⅴ. 일본제국주의와 개화운동

Ⅵ. 일본제국주의와 조합교회
1. 일본 조합교회 내부의 비판적 인식
2. 여운형 회유사건의 실패
3. 일제의 종교정책의 변화

Ⅶ.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데 이미 합방이 된 현재로서 일본과 협력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운형을 회유하고자 했으나 여운형은 시종 조선 독립의 필연성에 대해서 주장하였다. 그리고 여운형은 11월 27일에는 기자 회견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떳떳이 독립을 요구했다.
3.1운동으로 조선 민족은 완전히 각성했다. 민족적 자각을 가진 조선인의 자유,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어찌 일본이 방해할 수 있는가? 이 시대의 약소민족, 여성, 노동자의 해방이 절규되는 것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을 포함해서 세계적인 운동이 되고 있다. 우리들이 세우고자 하는 나라는 인민을 주인으로 하고 인민이 다스리는 민주공화국으로 만드는 것이고, 이는 세계의 대세의 요구이기도 하다. 조선 독립, 그것만이 일본과 협조하고 나란히 나아가도록 하는 동양 평화를 유지하는 제1의 기초이다.
그리고 12월 1일 여운형 일행은 어떤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상해로 무사히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일제로서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일제가 여운형을 일본으로 불러들이도록 한 것은 회유를 위한 것이었데, 심지어 기자 회견까지 마련해 주어 조선의 독립 주장을 발표하게 한 것은 큰 시행착오를 한 셈이었다. 이런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해 가장 당황한 渡瀨 등 조합교회 세력은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여운형은 완전히 마음을 고쳐서 이제는 독립운동을 깨끗이 단념”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거짓 편지까지 꾸며 여운형이 “일본 여행에서 눈이 열려 자신의 천직인 기독교 복음 전도를 소홀히 하고 정치 활동만을 위해 시간을 소비시킨 것을 충심으로 후회하는 바이다. 금후는 전 생애를 앞에서 말한 대로 오직 한길로 복음 전도에 헌신하고 싶다.”고 조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渡瀨의 이러한 자구책에도 불구하고 제42회 일본 제국회의 귀족원 본회의에서 原敬 수상은 여운형 방일 사건으로 빚어진 일련의 사태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그리고 조합교회의 목사들의 경솔한 행동을 신뢰한 것에 대해 후회와 울분을 느꼈고 이 일로 조합교회의 조선 전도부를 지극히 불신하게 되었다. 이때는 마침 原敬 수상이 식민지 정책을 바꾸어 문화통치를 하기 위해 齊藤實을 새 총독으로 임명하였던 때였다. 齊藤實은 부임하자마자 조선전도부가 개입한 여운형 사건이 발생하였고,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선교사 및 한국 교회와의 우호를 탐색하는 중에 原敬의 불신을 얻은 조선전도부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1921년 새해의 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조선 전도부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중단키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제의 정치권으로부터 불신을 얻게되고, 정책적인 배려로부터도 외면을 당하면서 조합교회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조선전도를 감행할 수가 없었고 급기야 조선 전도부를 해체하기에 이른 것이다.
3. 일제의 종교정책의 변화
조합교회의 조선전도가 개시되면서 총독부는 지원하였으며 또 조합교회측은 총독부의 조선인 공작에 공동보조를 취하는 상호관계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1913년 8월 1일부터 8월 5일까지 5일간 서울에서 열린 제1회 조합교회 조선대회의 개회식에 경기도 지사 檜垣直石이 나와서 축사를 하였고, 연일 계속되는 강연회에는 일본 조합교회의 목사 외에도 경성고등법원장 渡邊暢, 총독부 학무국장 弓削 등이 강사로 초빙되었고, 산림과장 등 총독부의 실력자들도 직접 참석해서 조합교회의 조선전도를 지원했다. 또한 총독부는 식민지 전도에 재정적으로도 후원했다. 적게는 연 6천 원으로부터 많게는 1만 7천 여 원에 이르는 기밀비를 제공하였고, 임시비로부터 추가해서 2만 5천 여 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데라우찌 총독이 직접 모금해서 조합교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 자금은 조선에서 민족의식을 발본하고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는 神民을 만들어 내자는 동화정책에 조합교회가 주체로 참여한 데 대한 대가였다. 데라우찌를 이은 長谷川好道 총독도 계속 조선전도부를 지원했었다.
그러나 반민족적인 친일 교회인 조합교회가 외면당하기 시작하고 교인들은 숫자가 줄기 시작하면서 조선 총독부는 조합교회에 대한 정책의 변화를 도모했다. 특히 앞서 전개한 조합교회 내의 내분과 조선전도부가 주도한 여운형 회유사건의 실패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조선 총독부는 1921년 예산안에 조합교회에 대해 더 이상 재정 지원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민족의식이라는 장벽 앞에 문화정책을 통해 한국인의 민족의식 그 자체를 변질시킬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재정지원 중단으로 표면화 된 총독부의 조선전도부에 대한 정책의 변화는 조합교회로 하여금 선교정책의 변화를 도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에게는 지금까지의 모습을 감추고 새로운 모습으로의 변화가 필요했다. 그것은 조선 전도부를 해체하고 조선 회중교회로 분리하는 선교 정책이었으나 그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Ⅶ. 결론
한 국가가 상대국가에 끼치는 영향력의 조성 및 여타 이득을 얻기 위한 행위 등을 수행하는 행위. 이 제국주의의 개념에는 지배의 요소와 착취의 요소인 두 가지 구성요소가 내포되고 있다. 특히 착취는 교역, 투자 또는 물리적 약탈의 형태를 취하면서 진행되는 과정으로 간주되며, 일반적으로 지배국 기업에 의한 피지배국의 부의 전유를 의미한다.
현대적 제국주의의 개념으로 일반적으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선진국인 강대국과 경제적으로 빈곤하며 군사적으로 약소국인 후진국 사이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제국주의는 후진국에서만 발생되는 현상이 아니고 선진자본국과 선진자본국 사이의 관계에서도 발생한다.
참고문헌
▷ 김동명(2009),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협력의 경계와 논리, 한국정치외교사학회
▷ 김승일(2011),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지역 재판소제도의 비교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역사문화연구소
▷ 김동노(2006),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의 독특성,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김동명(1999),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이론, 한국일본학회
▷ 김창록(1993), 일본제국주의의 헌법사상과 식민지 조선, 뿌리
▷ 박태준(1999), 일본 제국주의의 성격과 그 교육적 특징, 한국교육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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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3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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